[호식탐탐] ⑥ 한국에서 먹는 이탈리아식 샤퀴테리
전문가들 "다양한 제품군 긍정적…품질·풍미 뛰어나" 호평
[※ 편집자 주 = 각종 콘텐츠 플랫폼에서 '먹방', '맛집'이 주요 콘텐츠로 자리 잡으면서 먹거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요식업계는 자영업 태동기, 프랜차이즈 시대, 노포·맛집 유행기를 지나 이제는 어떤 식재료를 사용해 음식을 만들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식재료 시대'에 왔습니다. 연합뉴스는 농도(農道) 전북에 자리한 농촌진흥청과 함께 국내 우수 식재료(농축산물)와 가공식품을 중심으로 생산물, 생산자, 연구자의 뒷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또 현업에 있는 셰프와 식음업계 전문가들의 솔직한 식재료 리뷰를 담아내 소비자의 궁금증을 해소할 계획입니다. 코너 제목은 '좋은 식재료를 탐구하고 연구한다'는 의미로 호식탐탐으로 지었습니다.]
(전주=연합뉴스) 김진방 기자 = '후지'(後肢).
흔히 돼지 뒷다릿살이라 불리는 이 부위는 전체 정육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지만, 삼겹살과 목살, 갈비 등 구이용 부위를 사랑하는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외면받는다.
구이용으로 적합하지 않은 부위를 어떻게 소비시켜야 하는 가는 국내 양돈 시장의 오랜 숙제다.
국내 사정과 달리 육가공 선진국인 유럽과 일본은 뒷다리와 앞다리, 등심 등 소위 '비선호 부위'를 가공해 소비하고 있으며, 이들 국가에서 생산되는 샤퀴테리는 높은 가격으로 판매돼 농가 소득에도 큰 도움이 된다.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에서 발간한 '내 손으로 명품 발효햄 만들기'(2010)에 따르면 샤퀴테리는 고기와 고기 부속물 등으로 만드는 육가공품을 총칭하는 프랑스어로 유럽의 전통 방식을 따라 공장식 대량생산이 아니라 천연 재료를 사용해 만드는 수제 육가공품을 일컫는다.
스페인의 하몽, 이탈리아의 프로슈토와 살라미, 프랑스의 잠봉 등이 대표적인 샤퀴테리로 알려졌으며,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와인의 유행과 함께 널리 사랑받고 있다.
돼지 한 마리당 삼겹살, 목살, 갈비 등 구이용 부위 생산량은 36.5%인 데 반해 비선호 부위는 63.5%에 달한다.
양돈 시장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도 국내 육가공업의 발전은 시급한 상황이다.
다행스럽게 국내에도 비선호 부위를 활용한 샤퀴테리 생산에 공을 들이는 생산자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다.
전남 함평에서 이탈리아식 샤퀴테리를 생산하는 김태효(44) 대표는 대표적인 '한국형 장인'으로 손꼽힌다.
김 대표는 "우리 소비자들에게 이탈리아식 샤퀴테리를 선보이기까지 6년의 세월이 걸렸다"며 "2014년 이탈리아에서 고기 가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해 2020년이 돼서야 만족스러운 품질의 샤퀴테리를 생산해 냈다. 긴 시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온 보람을 느낀다"고 그간의 노고를 회고했다.
소금공장 집안의 첫째 아들인 김 대표는 2012년 점차 사양산업이 되어가는 소금을 대신할 새로운 먹거리를 찾다가 이탈리아 여행 당시 먹었던 샤퀴테리를 떠올렸다.
김 대표가 샤퀴테리를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가업인 소금공장에서 생산하는 신안 소금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과 재료비가 싼 비선호 부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처음 사업 계획을 주변에 알렸을 때 '유럽에서나 만드는 걸 한국에서 만들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한국에서는 샤퀴테리를 소규모로 만드는 곳들이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샤퀴테리가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를 잡지도 않았을 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모두의 우려 속에 김 대표는 2014년 주한이탈리아 대사관을 통해 이탈리아의 샤퀴테리 설비 제작 업체 리스트를 받아 샤퀴테리로 유명한 파르마 지역으로 떠났다.
김 대표는 "당시에는 맨땅에 헤딩한다는 심정으로 무작정 이탈리아로 떠났던 것 같다"면서 "일단 가서 기계 설비 업체를 통해 가장 유명한 샤퀴테리 장인을 소개받고, 거기서 어떻게서든 샤퀴테리를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기계 설비를 사는 대가로 지역에서 유명한 샤퀴테리 장인 두 명을 소개받았다.
샤퀴테리로 유명한 이탈리아 파르마 지역의 모데나라는 곳에서 1963년부터 샤퀴테리를 만들어 온 카르파리그나 안젤로(90)와 그의 아들 막시밀리아노(50)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두 장인은 멀리 동양에서 건너온 30대 청년이 얼마나 버티겠나 싶은 마음에 처음엔 경계했지만, 진지한 태도와 포기하지 않는 열정에 금세 마음을 열었다.
안젤로와 막시밀리아노에게 6년간 사사하며 샤퀴테리 제조 기술을 익힌 김 대표는 두 장인과 둘도 없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
두 장인은 함평에 샤퀴테리 공장을 짓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는 등 김 대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안젤로 샤퀴테리 레시피 마스터는 "한국의 기후와 모데나의 기후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공장을 짓는 것부터 설비를 세팅하는 것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에 이탈리아식 샤퀴테리를 선보이고 싶다는 김 대표의 열정에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면서 "한국 국내법상 샤퀴테리 가공에 첨가할 수 없는 재료는 대체 재료를 함께 찾고, 한국 기후에 맞는 발효 온도와 습도를 맞추는 것까지 우리의 샤퀴테리를 한국에서 최대한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방식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한국 현실에 맞는 현지화 노력도 필요했다.
막시밀리아노는 "우리는 고기를 햇볕에 건조할 수 있는 덕장을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해썹) 인증을 받으려면 위생 문제로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약간 당혹스럽기도 했다"며 "또 고기를 건조하는 채반도 나무를 사용하면훨씬 좋지만, 여러 제약이 있어 이런 점을 조정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 대표는 이탈리아의 발효 기술에 더해 농진청 축산과학원이 가지고 있는 한국형 발효생햄 제조 기술을 이전받아 접목했다.
이 기술의 핵심은 국산 돼지와 우리 기후에 맞는 한국형 발효 제조 기술을 통해 국내 소비자들 입맛에 맞는 샤퀴테리를 만드는 것이다.
성필남 농진청 국립축산과학원 연구관은 "스페인 이베리코 하몽이나 이탈리아의 살라미 등은 전통적인 지중해 기후에 맞춘 육가공제품"이라며 "우리 기후와 우리 돼지에 맞는 염지 방법과 염도를 어느 정도까지 낮출 수 있는지, 습도를 어느 정도 맞춰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기술 이전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성 연구관은 이어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가열하지 않고 발효해서 가공하는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부가가치가 크다"면서 "이런 새로운 맛과 문화를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것은 비선호 부위 소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6년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샤퀴테리를 만드는 데 사용한 돼지고기 재료비만 90억원, 이탈리아식 공장 설비를 갖추는 데 120억원의 비용이 들어갔다.
2019년 재료 혼합기와 샤퀴테리 건조를 위한 레일과 트롤리 등 모든 설비가 갖춰졌고, 2020년 하몽 제품이 처음으로 출시됐다.
현재 연간 생산량은 하몽을 기준으로 돼지 뒷다리 2만5천 족(足)으로 국내에서는 최대 규모다.
준비 기간이 컸던 만큼 시장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먼 거리를 이동해 국내에 공급되는 유럽 제품과 창고형 마트에서 판매되는 저가의 샤퀴테리와는 비교되는 훌륭한 품질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김 대표는 "공장을 세우고, 제품 출시를 위한 여러 시험을 거치는 과정에서 큰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우려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라며 "다행히 우리 제품의 가치를 알아주고 품질에 좋은 평가를 해주는 사람들이 늘면서 국내 대기업 등과도 협업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까지 꼭 지켜온 두 가지 원칙이 있다"면서 "이탈리아에서 배운 대로 현지에서 나는 제주산 흑돼지와 신안 천일염 등 국내산 재료를 사용하는 것과 발색제나 보존료 등 첨가제를 넣지 않는 장인의 제조 기술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도 김 대표의 샤퀴테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 출신인 장준우 어라우즈 오너셰프는 "국산 샤퀴테리 제품 중에는 품질과 풍미가 발군이고, 특히 복합적인 숙성향 등 관능적인 부분에서 유의미한 특징이 있다"면서 "다만 이탈리아 현지의 풍미에 비하면 아쉬운 점이 있다"고 평했다.
장 셰프는 "레시피를 현지의 방식에 따르더라도 현지의 효모를 사용하지 않으면 원산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맛을 재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서 "그러나 국산 흑돼지를 이용해 여러 샤퀴테리를 시도하고 있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덧붙였다.
광평미트 고용재 정육 그릴마스터는 "이번에 맛본 샤퀴테리 제품은 흔히 접하기 어려운 론자(등심 제품)나 코파(목심 제품) 등 제품이 다양하고 감칠맛이 뛰어났다"며 "하몽의 경우 지방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과 함께 입안에서 슬며시 녹아내리는 제주 흑돼지의 지방 질감이 스페인 최고등급인 이베리코 베요타 등급의 하몽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그간 지리산 버크셔K로 샤퀴테리를 만드는 이창석 셰프, 안동에서 국내산 하몽을 처음 출시한 하모하몽 김태훈 대표 등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샤퀴테리 장인들을 찾아다녔다"면서 "김태효 대표의 샤퀴테리 역시 한국형 샤퀴테리의 미래에 대해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하다"고 전했다.
chin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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