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스 스윕’ 희생양 된 흥국생명, 결국 권순찬 경질의 업보다
지난 1월2일 흥국생명은 권순찬 감독 경질을 발표했다. 당시 순위가 2위였으니 성적부진이 이유는 아니었다. 구단 윗선이 저연차 선수들 위주의 기용을 요구했고, 성적을 위해 이를 거부한 권 감독을 김여일 단장과 함께 날린 것. 새로 부임한 신용준 단장은 ‘선수기용 개입’을 부인하며 권 감독의 로테이션에 대해 팬 유튜브 등에서 문제제기한 것을 감독 경질의 이유로 들었다. 선수 출신 감독이 고심 끝에 내린 로테이션에 대한 팬들의 지적에 손을 들어주자 흥국생명은 배구계에서 ‘공공의 적’이 됐다. 팀 내 최고참인 김해란(39)과 김연경(35)도 나서서 구단 윗선 개입을 폭로하며 신 단장의 해명도 반박하기도 했다. 선수단의 경기 보이콧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코트 안팎으로 팀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이를 타개한 것은 역시 팀 성적 상승의 ‘달콤함’이었다. ‘배구여제’ 김연경을 중심으로 한 흥국생명 선수단의 경쟁력은 경력이 일천한 김대경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도 흔들리지 않았다.
선두 현대건설을 가시권에 놓고 추격을 계속 하던 흥국생명엔 ‘행운’도 유독 많이 따랐다. 현대건설의 개막 15연승을 주도한 야스민의 허리 부상이 장기화됐고,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시즌 초반의 기세가 사라진 현대건설은 새 외인 이보네 몬타뇨가 기대 이하의 기량을 보이자 성적은 더욱 곤두박질쳤다.
권 감독 경질 이후 아포짓 스파이커로 뛰던 옐레나를 김연경과 대각에 서는 아웃사이드 히터로 세워 전위에 두 선수 중 한 명은 반드시 전위에 위치시키는 로테이션(팬들이 그토록 쓰길 원했던 그 로테이션)을 사용하기도 했던 흥국생명은 아본단자 부임 이후 옐레나를 다시 아포짓으로 돌려보내고, 김연경과 하나 건너 뛰어 위치시키는 로테이션을 사용했다. 부임 초기 아본단자는 이를 ‘유럽식 로테이션’이라 설명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권 감독이 썼던 로테이션이었다. 돌고 돌아 ‘권순찬 배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김연경을 필두로 한 선수단의 탄탄한 전력에 각종 ‘행운’이 겹쳐 챔프전으로 직행할 수 있었던 흥국생명의 챔프전 상대는 현대건설과의 플레이오프를 2승으로 통과한 도로공사. 그러나 챔프전을 앞두고 도로공사 선수단엔 감기 바이러스가 덮쳤고, 이로 인한 컨디션 저하가 겹치며 챔프전 1,2차전을 쉽게 따냈다. 이 역시 흥국생명이 맞이한 ‘행운’ 중 하나였다. 역대 17번 열린 여자부 챔프전에서 1,2차전을 한 팀이 모두 이긴 것은 다섯 차례. 그 다섯 팀은 모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우승 확률 100%를 거머쥔 셈이었다.
2연승 뒤 2연패, 사상 첫 리버스 스윕의 희생양이 되려는 위기에 놓인 흥국생명. 2월말 사령탑을 맡아 자신의 배구 색깔을 입히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만 주어졌던 아본단자 감독과 흥국생명에겐 이 위기를 이겨낼 힘이 2% 부족했다.
5차전은 매 세트가 2점차에 갈렸다. 그러한 클러치 상황에선 감독과 선수들 간의 끈끈하고 긴밀한 소통이 필수인데, 2016~2017시즌부터 도로공사 선수단을 지휘하고 있는 김종민 감독에 비해 흥국생명은 고작 두 달도 되지 않은 감독으로 이를 이겨낼 수 없었다. 만약 사령탑이 아본단자가 아닌 올 시즌 시작부터 함께 한 권순찬 감독이었다면 이번 챔프전은 어땠을까? 스포츠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조금은 다를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흥국생명의 이번 챔프전 패배는 팀을 승승장구 시키던 감독을 무리하게 경질한 흥국생명의 조급한 결정, 그 업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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