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거장 줄줄이 꿴 봉준호 감독, 피렌체 사로잡았다
데 시카에서 로르와커까지…거장 호명될 때마다 뜨거운 박수갈채
"영화 철학? 없다. 하루하루 근근히 일해. 대신 일은 열심히"
(피렌체=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몇 년 전, 프랑스 리옹에서 우연히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님을 식사자리에서 뵌 적이 있어요. 떨렸어요.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무척 조용하시더군요. 계속 그분을 바라보면서 수프를 먹었습니다."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라선 봉준호 감독이 이탈리아 영화감독 벨로키오를 만났을 때의 일화를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먹는 동작을 취하며 리얼하게 묘사하자 이탈리아 영화 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봉 감독은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의 라 꼼빠니아 극장에서 진행된 '마스터 클래스'에서 자신은 한껏 낮추면서도 이탈리아 영화의 유구한 역사를 치켜세워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봉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에 대한 축적된 지식은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걸작 '자전거 도둑'(1948)에서 시작해 엘리오 페트리 감독, 벨로키오 감독에 이어 2018년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행복한 라짜로'까지 확장돼 나갔다.
봉 감독은 그에게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의 영예를 안겨준 영화 '기생충'의 클라이맥스에서 이탈리아의 칸초네 가수인 잔니 모란디의 '당신 앞에 무릎 꿇고'를 삽입했다는 사실을 언급해 또 한 번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는 "대학교 때, 영화를 많이 보고 공부하던 그 시절에 정치적인 이탈리아 영화를 많이 봤다"면서 페트리 감독, 벨로키오 감독을 차례로 언급한 뒤 "그 전통이 많이 옅어진 것인지, 후계자들은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다"며 오히려 패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모란디의 곡은 영화 '기생충'에서 등장인물들이 단체로 싸울 때 나온다"며 "무척 로맨틱한 곡인데 의외로 폭력적인 장면에 너무 잘 맞아서 삽입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는 올해로 제21회를 맞은 '피렌체 한국영화제'의 주요 행사 중 하나로 열렸다. 470석 규모의 영화관이 꽉 찼고, 관객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젊은 영화 팬들이었다.
봉 감독은 그의 페르소나(감독을 대변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배우)나 다름없는 배우 송강호에 대해 "한 명의 연기자라고 하기보다는 감독에게 영감을, 용기를 주는 존재"라고 소개했다.
그는 "예를 들면 '기생충' 클라이맥스에서 송강호가 우발적으로 하는 행동은 논란이 있을 수 있고, 관객이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송강호라면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며 "배우의 존재감이 창작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그는 '살인의 추억'에서 함께한 배우 박해일에 대해서는 "박해일을 보면 아름답다. 눈빛도 아름답고 사슴 같은 사람"이라며 "동시에 비누 냄새 나는 사이코패스 느낌도 있다"고 했다.
그는 "관객 입장에선 박해일이 연쇄 살인범이라고 믿고 싶지만, 사실 그 마음은 무척 위험할 수 있다"며 "범인일 수도 있고, 결백할 수도 있고, 범인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박해일에게는 있다. '살인의 추억'은 박해일 배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봉 감독은 박해일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박해일이 새벽 1∼2시 정도에, 술에 취한 채로 전화한 적이 있다. 관객들은 몰라도 자기는 알고 연기해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너는 범인이 아니다. 결백하다고 생각하고 연기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관객들은 너를 범인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말해줬다"면서 "그랬더니 괴로워하면서 전화를 끊더라"고 웃으며 말했다.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사로잡은 괴물 같은 작품들로 한국 영화사에 선명한 궤적을 그려왔다. 이어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데 이어 아카데미상 4관왕에 오르며 명실상부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봉테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철저한 사전 준비 뒤에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 만화가를 꿈꿀 정도로 만화광이었던 봉 감독은 스토리보드를 직접 그린다.
그는 "스토리보드를 그릴 때 만화가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면서 "감독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나는 그냥 불안해서 하는 거다. 미리 그려놓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다. 촬영 전날, 내 마음에 드는 스토리보드가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했다.
봉 감독은 지난해 영국 런던 외곽에서 신작 영화 '미키17' 작업을 했다며 "SF 영화고, 규모가 크지만 저다운, 저스러운 영화"라며 "슈퍼 히어로는 안 나오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봉 감독은 이에 따른 고충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시나리오 쓰기가 어렵고 괴롭다"며 "뒷산에 가서 땅을 팠더니 나무상자가 나오고 그 속에 일곱 개의 너무나 잘 써진 시나리오가 나오는 꿈을 자주 꾼다"고 웃으며 말했다.
봉 감독은 관객 중에서 시나리오 작가가 있으면 손을 들라고 한 뒤 "이렇게 수많은, 불행한 인생들이…"라며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겁이 나니까 주변에 보여주고 얘기를 듣고 싶어진다. 그럴 때 잘 참고 넘어가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조언했다.
봉 감독 영화의 대표적 특징은 우화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시대성과 사회성이다.
그는 "아무리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고 해도 개인의 작은 어떤 부분에 현미경을 들이대면 개인이 속한 맥락과 위치가 나온다"며 "어쩔 수 없이 계층, 계급으로 번져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정치적인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돼 버린다. '기생충'도 그런 케이스"라며 "그래서 어차피 계급이나 계층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면 설사 영화가 어두워지더라도 정면 돌파하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살고 있는데 똑바로 직시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기생충'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봉 감독은 "시나리오 쓴다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서 놀랐다"며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영화의 역사를 조금은 알고 이탈리아 영화만의 강력한 전통과 역사를 좋아했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탈리아 영화의 역사를 빛낼 수 있는 영화인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본인의 영화 철학을 묻는 질문에는 "없다. 하루하루 근근히 일하고 있다"며 "대신 일은 열심히 한다"고 겸손하게 답했다.
태극기 문화협회(회장 리카르도 젤리·부회장 장은영)가 주관하는 피렌체 한국영화제는 20년 넘는 세월 동안, 이탈리아에 한국 영화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지난달 30일 개막한 '제21회 피렌체 한국영화제'는 오는 7일 폐막한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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