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믿고 내 집에 온 북한 사람을 버리고 우리만 떠날 수 없다”[외교문서 공개]
강신성 대사 “초인적인 사명감에 매일 묘를 찾았다”
北외교관, 빗발치는 총탄 속 태극기 높이 흔들어
모가디슈 남북 합동 탈출 막전막후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수송기에 자리가 없다며 남측 인원만 탑승하는 것을 제안한 이탈리아측에 강신성 당시 주소말리아 한국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외교부는 6일 영화 ‘모가디슈’로 알려진 ‘소말리아 남북 공관원 탈출’ 사건을 비롯한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 2361권(약 36만쪽 분량)을 원문해제 요약본과 함께 일반에 공개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이 외교문서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1990년 12월30일 소말리아 반정부군이 수도 모가디슈로 진격했다. 강신성 주소말리아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과 교민 등 남한인 7명은 대사관저에 피신해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교신 불통으로 미국 대사관을 통해 경유해왔다.
당시 미국 대사관 일행들은 1월5일 헬리콥터와 선박 등으로 긴급 대피했지만, 우리 공관원들은 연락이 닿지 않아 미국 대사관이 주선한 대피방법을 이용하지 못했다. 외무부 본부와 주소말리아대사관의 연락이 쉽지 않자, 주한이탈리아대사에게 우리 공관원들의 비상철수에 협조를 당부했다.
1월7일 주이탈리아대사관에 따르면 이탈리아 외무성은 “한국의 요청을 충분히 감안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이탈리아측은 케냐에 대기 중인 공군수송기 2대(C-130)을 이용해 적십자기를 부착한 후 189명을 케냐의 몸바사로 1차 철수했고, 2차 철수를 위해 공군수송기 2대(C-222)를 모가디슈에 파견할 예정이나 교전상황 때문에 출발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주이탈리아대사관 문병록 참사관은 이탈리아 외무성 TF와 접촉해 추가 철수를 위해 파견 예정인 항공기편에 우리 공관원을 무사히 대피할 수 있도록 특별히 협조해 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 이에 TF는 “한국의 요청대로 공관원 및 가족을 추가 항공기편 철수계획에 포함시키기로 했다”고 답했다.
1월7일, 이탈리아 공군수송기가 모가디슈 공항에 도착했고, 해당 항공기에 4명의 한국인이 탑승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나, 최종적으로 우리 공관원들은 탑승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공항에서 한국인 3명이 수송기를 탑승하지 못한 것이 목격되면서 나머지 4명은 이미 탑승한 것으로 파악했으나 수송기의 최종 목적지인 몸바사 도착 후 확인한 결과 한국인은 아무도 탑승을 못한 것이다.
강 대사와 공관원들은 1월9일, 이탈리아 수송기를 타러 공항으로 갔지만 교신 오류로 탑승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강 대사는 공항으로 피신 온 김용수 북한대사 등 북측 인사 14명과 조우했다.
북한 대사관은 전날인 1월8일 20여명의 무장강도가 침입해 모든 것을 약탈해갔고, 직원들은 9일 공항대합실에서 탈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강 대사가 김 대사에게 공동탈출을 제의했고, 김 대사는 “1시간 반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강 대사는 “(김 대사가) 주재국 외무부 등 자기들을 보호할 만한 기관을 찾아갔으나 모든 행정기관이 마비 내지 풍비박살된 사실을 확인하고는 제의를 수락했다”고 밝혔다.
북측에서 이를 수락했고, 강 대사와 북한 공관원들은 9일 오후 5시30분 다함께 주소말리아대사관에서 1박을 했다.
강 대사는 1월10일 “관저에 식구가 늘어나자 신변위협이 더 커졌고 장기 체류할 경우 식량, 식수 문제가 심각할 것을 우려했다”며 교민 1명과 경비순경과 함께 이탈리아 대사를 찾아가 만나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탈리아 측은 구호기에 자리가 없어 7~8명만 탈 수 있다며 남한 인원만 태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에 강 대사는 “나만 믿고 나의 집에 와 있는 북한 사람을 버리고 우리만 떠날 수 없으니 모두 함께 떠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이탈리아 측이 전원 탑승이 가능하다며 모두 오후 5시30분까지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오라며 말했다.
강 대사와 김 대사 일행은 싸움이 가장 뜸한 오후 3시30분 관저를 출발해 3시55분쯤 이탈리아 대사관을 300m 앞두고 있을 때, 소말리아 군인들이 일행을 향해 집중 사격을 했고, 운전대를 잡았던 북한인 한상렬 씨가 사망했다.
강 대사는 “한 씨는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해 1분간 계속 운전해 이탈리아 대사관 뒤편에 도착했고, 2번째 차량의 후미를 치면서 정지하고 의식을 잃었다”며 “한 씨의 초인적인 사명감에 감복한 저는 그 후 매일 아침저녁 묘를 찾아 경배했다”고 보고했다.
이어 “한 씨가 피격 당시 치명상이었으므로 핸들을 놓았더라면 차량이 전복되면서 대열이 아수라장에 빠져 모두 총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며 “이탈리아 대사관 후문에 도착 후 문을 열어줄 때까지의 7분간 총탄 사격의 상황에서 기다리는 과정이 너무나 급박해 이창일 북한 서기관은 내내 태극기를 직접 높이 흔들면서 우리가 외교관이라는 것을 표시하면서 위기를 방지하고자 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강 대사는 김 대사 및 북한 공관원들이 대사관저에 들어온 후부터 구호기를 탑승할 때까지 20명의 일행을 모두 통솔했다. 김 대사가 농업 협동조합장 출신으로 영어를 전혀 못 했고, 이탈리아 대사와 직접 교섭이 가능한 강 대사가 자연스럽게 리드하게 됐다는 것이다.
1월12일, 이들은 이탈리아가 주선한 항공기를 타고 케냐의 몸바사로 탈출에 성공했다. 김 대사와 북한 공관원측은 강 대사에게 감사를 표했고 이 시점부터 별도로 행동하겠다고 말했다. 강 대사는 “이미 우리 몸바사 교민들이 우리를 위해 호텔 차량편을 모두 마련했으니 하루밤 더 함께 지내는 것을 제안했으나, 김 대사는 완강히 거절했다”고 밝혔다.
강 대사는 하룻밤 함께 더 있으면서 우의를 돈독히 하고, 사망한 한 씨 부인에 1000달러의 위로금과 노자를 보태줄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김 대사의 완강한 태도에 포기했다고 보고했다.
탈출 과정에서 북측을 최대한 배려하려는 정부와 강 대사의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강 대사는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있는 동안 이들의 딱한 처지를 우리가 악용한다는 인상을 줄 언행과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은 극히 회피하고, 오히려 그쪽을 우대한다는 자세를 견지했다”며 “이동 시마다 김 대사는 반드시 1호차에 탑승시켰고, 식품 등 생활필수품은 양측이 공평하게 나누어 쓰도록 했다”고 밝혔다. 또한 “정치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삼갔다”고 말했다.
우리 외무장관은 철수 과정에서 “북한인들은 인도적인 견지에서 케냐까지 동행 철수하는 데 협조하도록 하고, 도착 후 북한 측의 협조 요청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응하되, 북측의 독자적 행동 또는 북측에서 인도해 가는 등의 방안을 원할 경우에는 북측의 희망을 존중해 주는 방향으로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외무장관은 주케냐대사에게 보낸 전보에서 강 대사가 귀국한 후 기자회견을 할 경우 “저간의 사정을 북한 공관원에 대한 협조사항을 포함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되, 강 대사의 인도적인 도움이 자칫 과장 보도돼 우리가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북한 측에 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김 대사와 북한 공관원 13명 전원은 에티오피아에서 온 북한 공관 참사관의 인솔 하에 1월15일 출국했다. 강 대사는 15일 저녁 케냐 나이로비에서 출발해 17일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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