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같은 재료에서 이토록 다양한 생명들이 나타났다니!
현대 진화론의 최전선 생생하게 풀어내
생명의 레시피 DNA 직접 읽게 된 인류
‘포스트 게놈’ 시대는 어떻게 펼쳐질까
인간은 왜 인간이고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
운명을 가르는 생명의 레시피
이대한 지음 l 바다출판사 l 1만7500원
그레고어 멘델은 완두콩 실험을 통해 모든 생물에게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세계와는 다른, 개별 개체를 넘어 대물림되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노란 콩만 생산하는 완두와 초록 콩만 생산하는 완두를 교배했을 때 그 자손들에선 노란 콩만 나타났지만, 자손들끼리 교배했을 때에는 또다시 초록 콩이 나타나는 현상을 발견했다. ‘표현형’(phenotype) 뒤편에 있는 ‘유전자형’(genotype)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형의 세계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1977년 디엔에이(DNA)를 직접 읽어낼 수 있는 염기서열 분석법(‘시퀀싱’)이 고안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예쁜꼬마선충, 초파리 등을 통해 진화를 연구해온 유전학자 이대한(성균관대 생명과학과 조교수)은 첫 단독 저서 <인간은 왜 인간이고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에서 기존의 ‘순유전학’과 근본적으로 방향을 달리 하게 된 오늘날 ‘역유전학’이 어떻게 성립했는지, 여태까지 유전진화학의 성과는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등을 해설한다. 친절하면서도 적확한 비유를 동원해 유전학 최전선의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전달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세포는 디엔에이 속에 들어 있는 ‘정보’를 읽어내어 알엔에이(RNA)나 단백질처럼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물질’로 만들어낸다. 지은이는 이처럼 역동적이면서 정교하게 조절되는 ‘정보의 물질화’ 과정을 레시피(정보)가 음식(물질)이 되는 요리 과정에 비유한다. 요리사(환경)도 빼놓을 수 없다. 세포만이 읽을 수 있는 생명의 레시피를 읽어낼 수 없었던 ‘선사시대’에, 인간은 단지 요리된 음식만을 보고 레시피가 어떤 것인지 가늠해야 했다. 표현형으로부터 유전자형으로 향하는 순유전학이다. 20세기 들어 시퀀싱 기술의 발견 등으로 비로소 ‘역사시대’가 열렸다. 레시피(유전자형)를 직접 읽어내어 음식(표현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탐구하게 된 것이다. 2010년대 미생물학의 발전은 디엔에이를 직접 ‘편집’하게 해주는 ‘크리스퍼 가위’라는 선물까지 안겼다.
생명은 이 지구에서 이루 다 거명조차 할 수 없이 다양한 표현형들을 만들어내 왔다. 생명의 역사, 곧 진화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모든 생명에게 심어진 자기복제 프로그램에 따른 ‘닮음’(유전)에 기댈 뿐 아니라 대물림된 것들 사이에서 창의적으로 나타난 ‘다름’(변이)을 그 핵심으로 삼는다. “지구를 뒤덮은 생명의 다양성은 변이라는 마르지 않는 원료가 없었다면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전학의 기본이 ‘닮음’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발생학의 초점은 ‘다름’에 있다. 같은 수정란에서 유래한 똑같은 디엔에이를 지녔더라도 수많은 세포의 형태와 기능은 천차만별이다. 과학자들은 초파리의 몸이 머리-가슴-배 순서로 형성되는 이유는 ‘혹스 유전자’가 작동하여 각 구역마다 특정한 조합의 유전자 스위치를 켜고 끄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같은 디엔에이를 가진 세포가 차등적으로 발현되는 패러독스를 풀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다. 유전체를 직접 들여다본 결과 인간이 예쁜꼬마선충이나 초파리와 비슷한 수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고, 또 혹스 유전자를 포함해 많은 수의 유전자를 공유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말하자면 생명은 한정된 재료들을 가지고 엄청나게 다양한 요리를 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지은이는 질병과 지능을 빚는 유전자가 따로 있는지, 표현이 아닌 행동 역시도 유전하는지, 노화에 간여하는 유전자가 있는지, 성별 결정과 유전자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 오늘날 진화유전학이 맞닥뜨리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큰 규모의 대조군을 조성해 실시하는 ‘전장 유전체 연관성 분석’(GWAS)을 활용하면 질병이나 지능과 연관된 변이를 찾아낼 수 있고, 실제로 학력과 연관된 유전변이들을 발견해내는 성과도 있었다. 행동유전학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복잡한 행동까지도 유전자에 의해 조절된다는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지은이는 이런 발견이 ‘유전자 결정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지능 차이의 상당 부분은 환경에서 기인할 뿐 아니라 유전율과 유전변이의 효과 또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달라진다. 유전자가 행동 패턴을 좌우하는 신경회로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그 절대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유전학이 밝혀낸 상관관계를 ‘차이’로 받아들여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계기로 삼을지, 아니면 ‘차별’이라는 폭력을 휘두르는 데 쓸지는, 지은이의 지적처럼 인간 자신에게 달렸을 뿐이다.
책의 끄트머리에, 지은이는 생명의 진화가 ‘우연’에 따르는지 아니면 ‘필연’에 따르는지 따져본다. 대장균을 이용한 리처드 렌스키의 실험은 의문을 풀 실마리를 제공한다. 12개로 나눈 대장균 ‘부족’들의 장기 진화 과정을 살펴보는 한편 중간중간 얼려서 진화 과정을 되풀이할 수 있게 한 이 실험에서, 어떤 부족은 무산소 조건에서만 시트르산을 세포 안으로 운반하는 일반적인 프로그램을 깨고 유산소 조건에서도 이를 수송해 영양분으로 활용하는 ‘혁신’을 보여줬다. 얼렸던 대장균들을 녹여 진화를 ‘리플레이’했더니 이 혁신은 마치 ‘필연’처럼 반복해 나타났다. ‘리플레이’한 부족들이 혁신에 성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달랐기 때문에 이들은 ‘필연’에 이르는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 하나를 ‘우연’히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유전자들이 변이의 대상으로 좁혀지는 등 “적응 과정에서 자연선택이 선호하는 특정한 유전자 ‘표적’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우연’과 ‘필연’은 집단 수준의 적응을 만들어내는 씨실과 날실로서 조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이처럼 많은 것들이 드러났는데도 생명의 신비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깊다. “이해된 신비는 이해되지 않는 신비보다 더 경이롭”다는 지은이의 말 그대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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