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에서 ‘설문해자’까지, 한자 오디세이 [책&생각]
죽간과 종이책 등 매체 발달사와 서체 이야기도
“한자의 발전은 단방향 계승 아닌 복잡한 과정”
한자의 풍경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
이승훈 지음 l 사계절 l 3만5000원
최초의 한자 사전으로 꼽히는 <설문해자>는 중국 후한 때 학자 허신(58년께~147년께)이 편찬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허신은 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영감을 얻어 문자를 발명했다고 썼다. 그러나 한자는 특정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창작이라 보는 것이 정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4000년 전인 은나라 때 점술에 쓰이던 갑골에 새겨진 글자 갑골문이 한자의 원형으로 꼽히는데, 기원전 3000년 전후의 대문구(大汶口) 유적에서 발견된 도문(陶文), 또는 아예 기원전 4500년 전후 반파(半坡) 유적에서 발굴된 인면어(人面魚) 문양을 한자의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승훈 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교수는 <한자의 풍경>에서 “갑골문이 상나라 말기에 갑자기 생겨난 문자 체계가 아니”며 “한자의 발전은 단방향의 직선적 계승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가 창조되고 변형되고 또 일부는 도태되는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한자의 풍경>은 원시 한자의 탄생에서부터 <설문해자>가 편찬되기까지 한자의 출현과 발전에 투영된 중국 사회와 문화의 변모를 추적한다. 상형문자로 출발한 한자가 추상화·복잡화하면서 그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면과 외적 삶 역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한자 어휘들의 유래와 함의를 알려준다. 도기나 갑골에 글자를 새기던 데에서 출발해 청동기를 거쳐 죽간과 목간, 비단과 종이 책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매체의 발달사가 곁들여진다.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에서 착안해 한자를 발명한 것은 아니라 해도 지금의 한자에는 “새와 짐승을 관찰하던 고대 인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횟수를 나타내는 한자 번(番)은 원래 짐승의 발을 의미하는 글자였다. <설문해자>에서는 이 글자의 윗부분 변(釆) 자는 짐승의 발톱을 나타내고 아랫부분 전(田)의 형태는 짐승의 발자국이 땅에 찍힌 모양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변(釆) 자는 자세히 관찰하거나 분석한다는 의미 요소가 되어 자세히 살핀다는 뜻을 지닌 심(審), 분석한다는 석(釋), 자세히 알다는 뜻을 지닌 실(悉) 같은 글자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 중국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코끼리를 가리키는 글자 상(象)이 갑골문에는 매우 자주 등장한다. 게다가 ‘하다’는 뜻을 지닌 위(爲)의 갑골문 자형은 분명히 한 손으로 코끼리를 끌고 있는 모습이다. 갑골문이 쓰일 당시 중국 중원 지역에는 코끼리가 많았으며 생활에 중요한 존재였는데 기후와 환경의 변화 때문에 멸종되다시피 하면서 그야말로 상상의 동물로 남게 되었다. 그 뒤 상 자는 코끼리를 지칭하던 데에서 ‘닮다’(像)라는 의미로 전용되어 ‘형상’ ‘기상’ ‘현상’ 같은 말에 쓰이게 되었다.
주나라의 이름인 두루 주(周) 자는 경작지를 구획하는 울타리 사이에 농작물이 빽빽하게 자라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주나라가 농업을 강조하는 국가임을 알게 한다. 같은 농사 농(農) 자라도 갑골문은 한 손에 칼이나 도끼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잡고 숲에 서 있는 모습을 형상한 데 반해,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에서는 농지의 경계를 표시한 전(田) 자가 추가되었다. 이 교수는 “갑골문 농 자는 농경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숲의 잡목들을 베어내고 농지를 개척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인 데 비해, 나중에 생겨난 금문에는 가지런하게 정리된 농지가 추가되어 농경 생활이 안정적으로 정착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한편 갑골문에서는 마음 심(心) 자가 심장이라는 신체 기관을 가리키는 데 그쳤고 금문에서도 심 자로 이루어진 글자가 20여 자에 불과한 반면, <설문해자>에서는 심 자를 부수로 하는 글자가 263자로 크게 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이성이 예리해지고 감성이 풍부해짐에 따라 글자들이 계속 추가로 만들어진 결과”라는 게 이 교수의 해석이다.
산시성 허우마(후마)시에서 발견된, 춘추 시대의 유일한 필기 문자 자료인 후마맹서(侯馬盟書)는 북방을 대표하는 진(晉)나라의 문서인데 그와 비슷한 시기에 쓰인, 후베이성 쑤이저우의 초(楚)나라 증후을묘(曾侯乙墓)의 죽간 글씨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로써 제후국끼리 언어는 서로 달랐을 가능성이 있으나 동일한 문자를 사용하여 서로 소통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확인되었다.” 북방 유목 민족들이 중원을 차지했을 때에도 자신들의 문자를 포기하고 한자를 공식 문자로 채택함으로써 중국이라는 문명의 동일한 정체성을 이어 올 수 있었다.
갑골문과 금문 시절의 문자가 “소수 지배층의 장식적 전유물에 불과”했다면, 춘추 전국 시대에 출현한 사(士) 계층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위치해 실무 관료로 활동하는가 하면 지식의 전수자 역할을 했다. 제자백가로 알려진 지식인들이 대부분 이 계층 출신이었고 그 시대를 선도한 사상가가 공자였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면서 진(秦)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육국의 역사를 모두 불태워버렸지만, 진나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문서 행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렇게 첫 번째 제국 진나라는 시작부터 문자의 왕국이었다.”
통일 제국으로서 진나라는 지역별 문자 차이를 극복해야 했다. 승상 이사는 진나라에서 사용하던 주문(籒文)이라는 글자체를 기준으로 좀 더 간략해진 문자인 소전(小篆)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전체는 진에 이어 한나라 초기까지 행정용 문서체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예서로 대체되었지만, 아름다운 형태와 고전적인 분위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서예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돌이나 금속 등에 글자를 새기는 전각은 말 그대로 ‘소전을 새긴다’는 뜻이다.
한자의 발달과 사회 변화를 설명하면서 지은이는 역사서와 중국 고전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 미술까지 넘나드는 풍부한 전거를 동원한다. “원시 한자가 탄생한 순간에서 시작해 한자가 체계적인 문자로 완성되는 과정까지 그 사이사이의 빛나는 풍경”(‘서’)이 지은이의 유려한 글쓰기에 실려 눈앞에 펼쳐진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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