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기술에 대한 ‘미래 예측’보다 ‘철학’이 필요하다

한겨레 2023. 4. 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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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연할 때 마지막 슬라이드에 이 두 문장을 띄운다.

기술은 꼭 발전해야 하는가? 왜 그 기술이 필요한가? 누가 그 기술을 사용하는가? 그 기술로 누가 혜택을 입고, 누가 피해를 당하는가? 누가 돈을 벌고 권력을 쥐는가? 기술이 악용될 소지는 없는가? 기술의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 기술의 이전과 이후에 세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새로운 기술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가?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 기술 발전이 제안하는 좋은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이렇듯 기술철학의 문제는 인간과 사회에 근본적인 물음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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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의 과학 읽기]정인경의 과학 읽기

미래와 만날 준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술철학의 제안들
손화철 지음 l 책숲(2021)

나는 강연할 때 마지막 슬라이드에 이 두 문장을 띄운다. 과학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앞 문장은 검은색 글씨로, 뒷 문장은 파란색 글씨로 구분해서 OX문제처럼 보여준다. 모두가 과학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궁금해하는데 그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자고. 과학기술이 주어가 아니고 인간이 주어여야 한다고. 앞 문장이 ‘미래 예측’이라면 뒷 문장은 ‘철학’이라고 강조한다.

현대 분석철학의 거장, 비트겐슈타인은 ‘철학하다’란 말을 썼다. 그는 철학이 ‘학문’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단언했다. ‘study philosophy’가 아니라 ‘do philosophy’라는 뜻에서 쓴 말이다. 그러면 ‘철학을 공부하다’와 ‘철학하다’의 차이는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스승 러셀의 철학하는 태도를 비교해보자. 러셀은 평생 확실한 지식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연구했다. 과학을 의심하고, 수학을 의심하고, 논리학을 의심하면서 말이다. 러셀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이었다.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살면 좋은 삶인가를 생각하는 모든 활동을 철학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질까? 어느 동네로 이사 갈까? 심지어 어떤 전자제품을 살까도 철학이다. 우리 모두가 철학을 하고 살고 있다. 단지 사람마다 질문과 대답의 깊이가 다를 뿐이다. 철학자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본질적인 대답을 찾고, 평범한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철학은 철학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하는 것이다.

기술철학자 손화철의 <미래와 만날 준비>는 우리에게 낯선 기술철학의 세계를 소개하는 책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기술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일상생활을 압도하고 있다. 어디에서,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고민되는 시점에 이 책은 기술철학의 기본을 짚어준다. 먼저 신화의 시대에 출현한 철학의 가치에 주목한다. 철학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신화를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며 세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철학이 신화를 극복한 후에 현대의 기술이 또다시 신화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이를 직시하고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바로 기술철학이다.

기술철학의 역할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생각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기술은 꼭 발전해야 하는가? 왜 그 기술이 필요한가? 누가 그 기술을 사용하는가? 그 기술로 누가 혜택을 입고, 누가 피해를 당하는가? 누가 돈을 벌고 권력을 쥐는가? 기술이 악용될 소지는 없는가? 기술의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 기술의 이전과 이후에 세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새로운 기술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가?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 기술 발전이 제안하는 좋은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이렇듯 기술철학의 문제는 인간과 사회에 근본적인 물음에 도달한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 결국 현대의 모든 철학은 기술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지은이는 “기술 발전은 운명이 아니다”라고 하며, 명료한 답을 주지 않은 철학적 고민을 왜 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운명적 요소로 가득찬 세상에서 “운명에 지지 않으려는 사람만이 운명에 마주 서서 그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법이다.”

정인경/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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