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이승만, 제주도민 향해 민간인들에 테러 지시…'제주 4.3 사건' 조명

김효정 2023. 4. 7.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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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1948년 4월, 제주도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백골시신과 시멘트 - 1948,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부제로 제주 4.3 사건을 조명했다.

1991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잃어버린 마을을 찾고 있는 은희 씨와 탐사단 들은 제주도 다랑쉬 오름 인근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포착된 동굴. 동굴의 입구를 가리고 있는 돌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언가 반짝거렸다. 이들이 목격한 것은 바로 해골.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해골은 하나가 아닌 무더기로 발견되어 충격을 안겼다.

대체 동굴 안에서 발견된 백골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1947년 3월 1일 제주도, 3.1절 기념행사를 위해 몰려든 사람들. 그런데 경찰들은 그들에게 총을 쏘았고 이에 8명이 부상, 6명이 사망했다.

당시 편의를 위해 친일 경찰을 고용한 미군정, 이들은 도민들을 향한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해명했다. 폭도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을 향한 무력 행사에 제주도 내는 총파업에 돌입했고 기관과 학교, 회사 등 95%가 참여했다. 그리고 경찰은 총파업에 참여한 2,500여 명을 검거했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좌익 무장대가 경찰청을 습격했고 이에 경찰,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 이승만은 그러한 제주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은 산으로 향했다. 이에 제주도는 과반 투표율은 넘지 못했고, 이에 이승만은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다"라며 구축함을 보내 제주 해안선 봉쇄하고 육지에서는 응원 경찰을 파견했다. 그때부터 제주도에는 끔찍한 피바람이 휘몰아쳤는데 이것이 바로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당시 젊은 남자들은 폭도, 빨갱이로 몰려서 죽임을 당했고, 만약 달아났을 시에는 가족들이 대신 고초를 겪었다. 제주도에는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을 산폭도로 여기고 총살을 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던 것.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제주도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또한 이승만은 "제주도에 빨갱이들이 있다"라며 서북 청년단을 제주도에 투입했다. 민간인들에 테러를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군인, 경찰, 서북 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는 도피자의 가족라는 이유로 무고한 이들을 대신 죽였다. 이들은 마을 곳곳에 불을 질렀고 걸음이 느리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특히 이러한 참변은 제주도 전역 곳곳에서 일어났다. 어느 곳 하나 사망자가 없는 곳이 없었고 이러한 학살이 무려 7년 7개월 동안 계속되어 공식 집계된 피해자만 만 5천여 명에 이르렀다. 실제 희생자는 3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이 끔찍한 사건으로 제주도에서는 9명 중 1명꼴로 사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끔찍한 일에 대해 누구도 다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연좌제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으로 스스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데 1991년 12월 24일 세상 밖으로 그날의 이야기가 공개된다. 다랑쉬 오름을 오르던 은희 씨와 조사단은 사실 4.3 연구소 소속이었던 것. 이들은 제주도의 백골에 대한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다랑쉬 오름으로 향했고, 동굴 속에서 누군가가 생활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백골이 4.3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예감했다.

조용히 은밀하게 사건에 대해 조사하던 4.3 연구소 사람들은 김종민 기자를 통해 과거 다랑쉬 인근 동굴에서 살았다는 채 씨 할아버지를 만났고, 그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집단 자살의 가능성이 있어 보였던 백골에 대해 채 씨 할아버지는 "내가 이 시신들을 정리한 사람입니다"라고 했던 것.

1948년 11월 토벌대를 피해 동굴에 머물렀던 채 씨. 그 후 동굴을 떠났던 그는 12월 군경 토벌대가 다랑쉬 오름으로 올라온 것을 목격하고 몸을 피했다. 대토벌 작전을 펼친 토벌대는 사방에 불을 지르며 마을을 다 태워버렸던 것.

동굴 쪽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채 씨는 돌라 막힌 동굴의 입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동굴 안에는 벽과 바닥에 코를 파묻고 죽어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 이들은 끝까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이에 동굴을 쉬이 떠나지 못한 채 씨는 시신을 정리하고 순서대로 번호와 이름도 기록했던 것이다. 4.3 사건과 관련도 없이 살기 위해 산으로 도망갔던 이들은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는 그곳에서 그렇게 쓸쓸하게 죽어갔던 것.

44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백골들, 이에 제주 4.3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유족들은 유해수습과 진상 조사만을 바랐다. 하지만 당시 관련자들은 시멘트로 동굴 입구를 막아버리고 유골은 화장하는 것으로 정해버렸다.

유족들의 의견은 전혀 듣지 않은 채 유족들의 도장을 빌려 졸속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유족들은 어떤 항의도 하지 못한 채 가족들을 그렇게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4.3 사건을 알리는 계기가 된 다랑쉬굴 사건. 이후 7년 만인 1999년에 4.3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진상 조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2003년 국가 원수 최초로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다. 이는 무려 4.3 사건이 발생하고 56년 만의 일이었다.

이에 유족들은 "국가의 원수가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유족 4만 명이 모두 울었다"라며 "드디어 산폭도가 아니라 희생자라고 하니까 그걸로 만족했다"라고 평생의 누명을 벗은 것에 안도와 기쁨의 눈물을 흘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렇게 마무리된 4.3 사건. 그럼에도 여전히 찾지 못한 희생자들, 평생 고통 속에 산 유족들에게는 4.3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이에 마지막으로 방송은 이 사건을 잊지 말고 더 많이 알리고 더 오래 기억해야 해 달라 부탁했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되기에 더욱더 오래 기억해야 함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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