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이야기꾼과 작가 사이
키가 2m쯤 되는 개구리가 갑자기 나타나 함께 도쿄를 구하자고 한다. 은행에서 융자관리를 한다지만 빚 독촉이 주 업무인 남자더러 지진의 원흉, 지렁이와 싸우자니 어리둥절하다. 지금 그가 도와주지 않으면, 지렁이가 2월18일 아침 8시 반쯤 도쿄를 덮쳐 15만명이 죽게 될 거라고 겁도 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의 시작 부분이다. 소설은 1995년 고베 대지진 발생 4년 후인 1999년에 발표되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사진)에 나오는 미미즈, 지렁이가 여기에도 등장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미미즈, 지렁이도 지진을 일으킨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미미즈의 세계 사이에 문이 있고 요석이 지진의 폭발을 막고 있다. 자칫 문이 열려 버리면 미미즈가 뚫고 나와 지진이 세상을 뒤덮어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만다. 스즈메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미미즈를 보고, 문을 여닫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을 가리켜 흔히들 ‘재난 3부작’이라 부른다. 앞선 두 작품이 가상의 재난을 다뤘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여러모로 실제 발생했던 일본의 재난들과 연관된다. 간토, 고베, 미야자키, 에히메, 센다이. 스즈메가 경유하는 곳들은 큰 상흔을 남긴 재난의 장소들이다. 재난의 장소는 폐허로 버려졌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치거나 죽고, 흩어져 버렸다. 스즈메 역시 유년기에 엄마를 잃었지만 왜 잃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결핍과 상처를 가진 주인공 스즈메는 폐허가 된 공간들을 경유하며 재난의 출구를 봉쇄하고 미래의 재앙을 봉인한다.
중요한 것은 문을 닫기 위해선 반드시 기억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재난을 가두기 위해선 먼저 그곳에서 재앙을 맞아 돌아오지 못하게 된 피해자들의 기억을 소환해야만 한다. 피해자들의 감정을 기억해 내고 고통을 나누어야만 열쇠가 봉인의 효력을 갖는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서 외면하고 배제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들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종의 집단적 치유 과정이 필요한 셈이다.
문제는 이 교감의 방식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확장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영혼이 된 피해자들과도 초월적 교감을 시도하면서 왜 살아 있는 피해자에 대한 교감과 사죄는 어려운 것일까?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 그게 바로 역사적 인식의 시작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 치유와 이해는 늘 선택적으로 보인다. 집단적 치유는 사실 확인 및 사죄를 동반해야 한다. 가해자의 사죄 없는 집단적 치유는 자기 최면이나 정신 승리와 다를 바 없다. 대지진과 같은 반복된 자연재해 앞에서 일본은 절대적 피해자의 위치에 익숙해진 듯싶다. 자연으로부터의 재앙은 가해와 피해를 따지기 어려우니 배타적 적대시로 서로를 위계화하거나 내밀한 치유의 방식으로 자기 구원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분화된 방식 속엔 진정한 이해와 화해가 없다.
사린 가스 테러와 고베 지진 이후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인칭의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3인칭 행위의 세계를 고민하게 된다. 2014년 그는 일본의 원전 사고 대응을 두고 “지진과 해일만 가해자고 나머지는 다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며 비판했다. 한편 2015년엔 “침략은 사실이고 사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일본의 우경화와 무책임에 대해 여러 번 선명한 목소리를 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적 작가인 이유는 그가 단지 일본인으로 자기만의 아픔과 상처에만 몰두하지 않고 이웃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동일본 대지진은 분명 가슴 아픈 재앙이며 비극이었다. 그러나, 한편 동일본 대지진은 원전 오염수를 비롯해 누군가 여전히, 책임을 져야만 하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기도 하다. 눈물겨운 사랑의 문법으로 제안된 치유와 마술적 화해는 아름답지만 말 그대로 평면적이다. 나의 아픔만 호소하는 유아적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언어를 쓰는 이웃과 동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작가라고 부른다. 진단과 사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작가가 더 절실한 시대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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