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아는 것이 힘이다
고전 경험론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경험되는 사실을 바탕으로 증명과 검증 과정을 거처 새로운 지식을 도출하는 귀납법을 강조했다. 베이컨은 증명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기존 지식들을 4가지 ‘우상’으로 분류했고,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비단 자연과학에서만 ‘아는 것이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 국민이 ‘아는 것’이 사회 변혁의 단초가 될 수 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이 이런 사례이다. 대학 시절 내내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정치 민주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그렇게 이야기도 했었다. 결국 지식인이, 학생이, 국민이 아는 것이 힘이 되어,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군부독재가 무너졌고, 대통령 직선제가 정치 기득권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적 모순을 제대로 알고 사회 변혁을 추동했던 사례는 역사에서 오히려 예외이다. MIT대학의 아세모글루 교수와 동료들은 서유럽 국가들이 그들의 이해에 따라 정주형 식민지와 착취형 식민지 형태로 식민지배를 했고, 이때 이들 식민지에 만들어진 경제 제도가 독립과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이런 경제 제도의 차이가 서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의 경제성장 차이에 근본적 원인이었음을 실증 연구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나아가, 착취형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 여전히 착취형 경제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세모글루와 로빈슨은 다음과 같은 이론적 모형을 제시했다. 즉, 민주화 이후에 정치 엘리트들은 착취형 경제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할 유인을 가지나, 파편화된 일반 국민은 공익을 위한 집단적 행동을 할 유인이 약해, 결국 형식적 민주주의 아래에서 착취형 경제 제도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득권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속적으로 챙기기 위해서 기울이는 노력 중 하나가 잘못된 상식을 ‘우상화’하고 국민이 제대로 알 수 없도록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다. 비상장 벤처기업에 ‘1주 10의결권’을 가지는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것이 핵심 내용인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한국적 상황에서는 ‘벤처 버블’을 낳고, 상법의 ‘1주 1의결권’ 원칙을 무력화하고, 재벌의 4대 세습에 악용될 ‘시한 폭탄’이다. 그럼에도 ‘벤처 활성화’라는 ‘우상’을 앞세워 정부와 일부 의원들은 집요하게 법안 통과를 주장하고 있다.
이 법안을 추진하는 정치인과 관료 그리고 지지하는 벤처기업인들도 복수의결권 주식이 재벌세습에 악용되는 것은 반대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법안대로, 상장 후 3년 안에 복수의결권 주식을 보통주로 전환, 즉 일몰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예를 들어 보자. 60개 복수의결권 주식을 가진 창업자가 400개 보통주를 가진 일반주주를 상대로 60%의 의결권을 행사하다가 복수의결권 주식이 보통주로 전환되면, 의결권 지분이 13%(46분의 6)로 급감해 경영권을 잃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중소벤처기업부는 창업자가 상장 후 잘 준비해서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는 말만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한다. 결국, 보통주 전환을 연기해 달라 또는 아예 일몰 규정을 없애달라고 할 것이고, 이는 공평성 논쟁과 재벌 기업에도 복수의결권 주식을 허용하라는 여론몰이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
이 법안을 찬성하는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은 거듭된 공개토론 요구를 거부해 왔다. 결국 국민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알면서도 다선 의원이나 당 지도부의 눈치를 보면서 침묵하는 법사위 민주당 초선 의원들이 다수이다. 국민이 안다면 이들의 행위도 바뀌지 않을까? 결국 국민을 위한 의정활동보다 당 지도부나 극성 지지자에게 영합하는 것이 공천을 받을 수 있는 길이고, 공천을 받으면 소선구제에서 승산이 있다는 셈법이 의원들 머리에 가득할수록, 중요한 사회·경제 문제는 정치 의제가 될 수 없다.
정치가 정쟁이 아닌 정책 경쟁이 되어야 한다는 데 대부분 국민은 동의하고 있다. 결국 우리 정치 과정과 정당 정치가 미래지향적 정책 경쟁으로 나아가기 위해 ‘창조적 파괴’가 필요한 시점이고, 이를 위해서 비례대표 비중의 획기적 확대와 비례대표 선출에 국민의 직접적인 의사 반영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선거제도 개편의 구체적 내용은 공론화되지 않고 있다. 이해가 첨예하게 맞물린 현역 의원과 기득권 정당이 국민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선거제도 개편 논의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제대로 바뀔 수 있다. 선거제도 개편을 위한 국회 전원위원회 이후에, 숙의 과정이 있는 공론화 조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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