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봄비 맞으며
반가운 봄비. 봄은 이미 늙은 과객인데 비는 너무 오랜만의 손님이다. 고마움을 넘어 달콤하기까지 한 봄비 보는데 두보(杜甫)의 시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좋은 비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모든 것 피어나게 하네/ 바람 따라 몰래 밤으로 들어와/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네.” 시절은 봄을 훌쩍 지났지만 이제 본격 꽃은 피어나고, 이참에 빗줄기에 등짝을 맞으며 활짝 개구리로 변신하여 뛰어오르는 올챙이도 있을 것이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내리는 비는 어디에도 없다.
바람 따라 몰래 밤으로 들어온 비. 세상 만물을 촉촉히 적시는 것처럼, 빗소리는 대낮의 사무실로도 당당히 잠입해왔다. 유리창을 열자 묵은 공기가 빠져나가며 새 기운으로 교체되고 빗소리가 금세 손에 만져질 듯 방 안에 가득 들어찼다. 시무룩하게 내뱉었던 한숨들이 구석에 쌓여 있다가 우르르 몰려나갔다. 급기야 사무실 가운데 멍청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나의 가슴으로도 쳐들어와서는 모종의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멀리 안개에 쌓인 심학산을 바라보다가 자취를 감춘 낮달이나 태양의 행방을 쫓아보다가 서랍을 열었다. 습습하던 내 마음이 홀랑 뒤집어지면서 내처 서랍도 뒤집고 싶었던 것이다. 묵묵히 시키는 대로만 하던 서랍은 지루하게 기다렸다는 듯 눅진한 공간을 열어주었다. 이 또한 비의 덕분이다. 빗소리가 아니었다면 그저 컴퓨터 자판이나 두드리며 맥락 없는 화면이나 들락날락거렸을 나의 싱거운 오후였을 것이다. 물기로 촉촉해진 공기가 팽팽한 기운을 조이면서 오랜 숙제 꾸러미가 툭 굴러 나왔다. 그중 하나는 이 우중의 분위기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길도 늙는가’라는 메모.
아주아주 오래전 비 오는 날, 택시 타고 가다가 운전수 아저씨와 나눈 대화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끄적거린 것이었다. 그러다가 비가 비를 불러 일으켜 이렇게 오늘 햇빛을 보는 것이다. 이제 나도 만물 가운데 제법 많이 늙은 개구리류에 속하는가 보다. 기억이라면 웬만큼 자신이 있었는데 <길도 늙는가>에 더 덧붙여 전개시킬 내용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멋을 잔뜩 부린 말인데 길바닥에 흘린 소금처럼 아무런 맛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깥에는 달콤한 비 오고, 나무들은 모처럼 웃고 있는데.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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