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제67회 신문의 날
꽤 당혹스러웠다. ‘문신닙독’이라고 적힌 제호를 처음 봤을 때 그랬다. 학창시절 얘기다.
도대체 뭔 말일까. 알고 보니 국내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의 19세기 후반 버전 표기였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글은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적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기억의 한 토막은 또 있다. 당시 신문에 실리는 기사의 문체는 대부분 구어체였다. 그리고 먼저 호칭 또는 주어와 함께 결론을 짧게 앞세웠다. 이를테면 “묻노니 동포들이여”라고 시작한 뒤 “힘을 기르소서” 등으로 끝나는 식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글도 그랬다. 그래서일까. 당시의 신문 기사들은 대부분 연설문처럼 읽혔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전신인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가 주도해 창간했다. 1896년 4월7일이었다. 순한글 3개면과 영문 1개면 등 총 4개면으로 구성됐다. 처음에는 주 3회 300부씩 발행했다. 이듬해 1월5일부터 영문판은 4개면짜리 ‘The Independent’로 분리됐다.
1898년 7월1일부터는 일간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일간지로 발행됐다.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주시경 등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독립협회가 해체된 이후에는 윤치호, 헨리 아펜젤러 등이 잠시 맡았으나 정부가 인수한 뒤 1899년 12월4일 폐간됐다. 3년 남짓 발행됐던 셈이다.
독립신문에 실리는 기사는 당시의 한글 쓰임새를 살펴보는 데도 소중한 자료다. 1933년 폐지된 아래아(·)도 사용됐다. 한글에 띄어쓰기를 정착시키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한글을 쓸 때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정부가 독립신문 창간일을 신문의 날로 정했다. 1957년이었다. 올해가 67년째다. 그런데 매년 이날을 맞을 때마다 궁금한 게 있다. 독자들은 아직도 신문을 ‘사회의 공기(公器)’로 바라보고 있을까. 독자들에게 더욱 겸손해져야 하는 까닭이다.
허행윤 기자 heohy@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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