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적은 비는 하늘 탓, 물 부족은 정치 탓”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제6차 보고서 발간을 끝으로 8년 여에 걸친 임기를 마무리한 이회성 의장과 최근 짧게 통화했다. 향후 거취를 물으니 “기후변화가 피상적 시류(時流)로 다뤄지지 않도록 문제의 본질을 알리는 활동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기후변화 현상의 복잡성은 사라지고, 모든 이슈를 ‘기후변화 탓’으로 돌리는 세태가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기후변화가 어떤 이슈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듣고 호남권 가뭄이 떠올랐다. 한 지자체장이 최악으로 치달은 이번 가뭄에 대해 최근 “극심한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작년 여름 장마전선과 태풍이 이 일대를 절묘하게 피해가며 평년보다 강수량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작년보다 비가 더 적게 내린 해에도 이번처럼 가뭄 피해가 심하진 않았다. 작년 여름 서울에 쏟아진 ‘시간당 141㎜ 비’처럼 이 사태가 순식간에 벌어진 것도 아니다. 가뭄은 1년 넘는 시간 동안 천천히 진행됐다. 철저히 대비했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기후변화라는 단어 뒤로 숨는 것은 1960~1970년대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를 짓던 ‘천수답(天水畓·빗물로만 경작하는 논)’ 시절에나 먹힐 법한 변명이다.
‘가뭄 경고’가 처음 나온 것은 작년 2월이었다. 그해 1월 겨울비가 평년(26.2㎜)의 10%에 불과한 2.6㎜만 내려 1973년 이후 1월 강수량으론 최저치를 기록했다. 봄을 지나며 비가 평년보다 적게 내릴 경우 큰 가뭄 피해가 전국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그때 대구로 취재를 갔었다. ‘최악의 겨울 가뭄’이 발생했는데도 정부는 4대강 모니터링을 한다며 보(洑) 수문을 열었다. 농업용수가 부족했던 농민들은 반발했다. 메마른 양파밭 땅에 발을 구르자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던 기억이 난다. 당장 밭에 댈 물이 부족하자 환경부에선 2000만원을 들여 그 지역에 임시 양수기를 설치해줬다. 그때 만난 한 농민은 “보 수문만 닫으면 되는 일에 왜 세금을 낭비하느냐”며 “비가 내리지 않은 건 하늘 탓이지만, 물이 부족한 건 정치 탓”이라고 했다.
호남권 물 부족 피해를 오로지 기후변화 탓으로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이번 사태에서 배워가야 할 부분을 잃어버리게 된다. 노후 수도관에서 새어나가 낭비된 물이 얼마나 되는지, 호남권의 수원(水源)을 오랫동안 섬진강으로만 둔 것이 향후 같은 가뭄 상황에서 물 확보에 불리하진 않는지, 물 그릇과 물 그릇을 연결할 관로가 추가로 필요한 것은 아닌지 등 이번 사태에서 부족했던 대응을 면밀히 돌아보고 대책을 잘 마련해야만 ‘다음 가뭄’을 막을 수 있다.
호남권 시민들이 절수(節水) 등 물 이용에 불편함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환경부가 작년 7월부터 가뭄 대책을 잘 마련한 덕에 물 공급이 끊기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적은 강수량은 기후변화에 원인을 돌릴 수 있지만, 결국 이 재해에서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한 건 사람의 힘임을 부정할 수 없다. 4월 초부터 전국에 비가 내리며 가뭄 해소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제 6월부턴 장마를 걱정해야 할 때다. 가뭄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홍수로 또다시 상처 입지 않으려면 하늘을 탓하기 전에 정부와 지자체가 잘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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