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의 진짜 원인은 ‘제주도 反日정서’였다고? [유석재의 돌발史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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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4월 초만 되면 늘 돌아오는 기념일을 계기로 정쟁이 벌어집니다. 제주 4·3 사건을 둘러싼 공방입니다. 4·3은 수많은 무고한 국민이 국가의 폭동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불행한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2020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4·3 추념식에서 했던 말처럼 4·3을 ‘통일정부 수립 운동’이라고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통일정부 수립’이란 말은 4·3 무장폭동을 일으켰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내건 슬로건이었고, 그들의 목적은 5·10 총선거 방해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수립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의 당시 발언은 ‘무고하게 희생된 줄 알았던 제주도민 2만여 명(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이 사실은 남로당에 포섭된 사람들이었다’는 엄청난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해석입니다. 그런 말을 5·10 총선거에 의해 수립된 나라인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이 했다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런데 4·3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분석할 때만 가능하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나왔습니다. 한국정치학회장, 정당학회장과 국회입법조사처장을 지낸 정치학계의 중진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입니다. 그의 의견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4·3 사건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 왜 문제라고 보는가.
“최근 들어 이념적인 관점에서 제주 4·3사건을 분석함으로써 남·남 갈등을 증폭시키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국민통합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이념에 몰입될 경우, ‘단독정부’ 또는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포용을 불가능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비극을 오로지 민족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축소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4·3의 ‘지정학적 상황’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그것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 즉 일본의 종전(終戰) 대책과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공 및 상륙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본의 종전 대책과 제주도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대미전(對美戰)과 대소전(對蘇戰)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재편성 및 재배치에 착수했다. 대미전에 대비해 대본영 직할부대로 제17방면군을 신설해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중부 이남을 작전 지역으로 맡도록 하고, 중부 이북 지역은 대소전을 대비하는 관동군이 맡도록 함으로써 이미 한반도 분할의 단초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 군사적 구도 속에서 제주도는 어떤 위치에 놓였던 것인가?
“1945년 3월 12일 대본영 작전회의에서 제17방면군에 보낸 ‘7호 작전’에 따르면, 일본은 미군이 북규슈(北九州) 상륙을 위해 8월 이후 제주도를 점령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기초해 3월에 제96사단을, 4월에는 제58군사령부를 제주도에 배치했다. 4월 이후에는 제111사단을 만주에서 제주도로, 제121사단을 하얼빈에서 제주도로, 독립혼성 제108여단을 일본 본토에서 제주도로 이동 배치했다.”
-그렇다면 대단히 많은 숫자의 일본군 병력이 제주도에 배치됐던 것일 텐데. 전략적으로 동서로는 중국과 일본 사이, 남북으로는 오키나와와 한반도 사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인 제주도가 전쟁 말기에 아주 중요한 지점으로 떠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1945년 7월에 나온 일본군 제17방면군의 정세 판단에 따르면 역시 미군이 규슈에 상륙하기 전에 먼저 제주도를 공략할 가능성이 크다고 파악했다. 1945년 2월 제주도 주둔 일본군은 약 1000명에 불과했으나, 8월에는 제58군사령부 산하에 6만여 명이 주둔할 정도로 병력이 폭증했다. 이는 당시 제주도민 22만 명의 28%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후에도 대본영은 미군이 제주도를 대일 공격기지로 삼을 수도 있다고 판단해 제주도에 병력을 증파할 계획까지 수립했을 정도다.”
-지금도 제주도 곳곳에서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군사기지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에 일본군은 한라산 중턱에 자동차 도로를 건설하고 제주도 각지에 토치카를 비롯한 방어기지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과 노력 동원이 강요되고 재산상으로도 막심한 피해를 주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이 때문에 제주도민의 반일(反日) 감정은 육지의 그 어느 곳보다도 높았을 것이며, 이러한 분위기가 8·15 해방 이후에 분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8·15 이후의 상황은 어떘는가?
“일본의 항복 직전에 소련군이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군은 8월 8일 밤 11시 50분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공한 후 일본군과 전투하며 남진했다.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제25군으로 병력은 약 12만 5000 명 정도였다. 8월 25일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8월 30일 함경남도인민위원회로 개칭)가 결성됐고, 치스차코프 대장의 명령으로 함경남도의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이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등 소련군이 주둔한 순서대로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가 결성돼 그 지역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접수했다.”
-미군이 점령했던 남한 지역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은 무엇이었나?
“그냥 점령만 한 것이 아니라 신속하게 ‘북한 정부’를 세웠다는 것이다. 1945년 10월 8일 소련군의 지휘 아래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대표대회’가 개최돼 각 도 간에 당면 문제에 관한 유기적 연락을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1945년 11월 19일 북한 5도의 연락기관으로 ‘북조선행정국’을 평양에 설치했고 그 산하에 산업·교통·체신·농림·상업·재정·교육·보건·사법·보안의 10개국을 설치했다. 급기야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1949년판 ‘조선중앙년감’ 68쪽은 이를 ‘행정적 주권기관이 조직’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실상 단독정부가 수립됐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같은 시기 38선 이남에서 미군은 뭘 하고 있었나?
“1945년 9월 6일 미군의 선발대가 김포 공항에 도착해 총독부 관계자와 제반 문제를 협의했다. 9월 8일 오후 1시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 제24군이 인천 월미도에 상륙했다. 9월 9일 오전 8시 서울에 도착한 미군은 오후 3시 조선총독 및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접수하고 태평양 미 육군사령관 명의의 포고에 따라 군정 실시를 선포했다. 군정을 실시한 점에서 인민위원회를 통해 간접통치를 한 소련군과 차별성을 나타낸다.”
-미군 상륙 이전에 남한엔 건국준비위원회가 존재하지 않았었나?
“서울에서는 여운형 주도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돼 일정 부분 치안 유지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고, 미군 본진이 상륙하기 전인 9월 6일 건준은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하부조직으로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미군과 마찰이 있었을텐데.
“미군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도 미군을 보내 지방인민위원회의 해산에 착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인민위원회와 미군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제주도의 경우 미군의 도착이 늦어져 1945년 9월 28일에서야 일본군의 항복조인식이 거행됐다. 미군의 진주가 늦어진 만큼 인민위원회의 조직이 강화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게 됐던 셈이다.”
-1946년 2월 사실상의 북한 정부가 수립된 뒤의 상황은?
“북한에 단독정부 성격의 기관이 수립되자, 지방을 순회하던 이승만 박사는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에도 이와 유사한 기구를 만드는 게 좋겠다고 발언했다(정읍 발언). 이를 구체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설립을 추진했다.”
-순조롭게 설립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안다.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대구 지방을 중심으로 파업을 주도했고, 각 지역에서 박헌영의 노선에 동조하는 세력이 파업에 동참함으로써 파업은 전국적인 규모의 항쟁으로 변질됐다. 경찰과 미군이 항쟁을 주도했던 세력의 대부분을 체포·구금했다. 이로써 항쟁에 나섰던 세력은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기록상으로 볼 때 제주도는 육지와 달리 ‘파업투쟁’이나 ‘군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제주도는 왜 그랬던 것일까?
“기본적으로 제주도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일제의 강압과 착취가 다른 지역보다 심했기 때문에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요구가 더 강했던 것이다. 해방 후 이러한 정서를 반영해 조직된 단체가 인민위원회다. 상대적으로 미군의 진주가 늦어짐에 따라 인민위원회 조직이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10월 항쟁’의 여파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제주도 내 인민위원회 조직이 온존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었다. 이러한 제반 지정학적 요인이 중첩돼 5·10선거에 즈음하여 폭발한 것이 바로 4·3사건이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지정학적 요인이 촉발했던 강한 반일 정서가 4·3 사건의 큰 원인이 됐다는 말인가?
“다른 지역보다 반일 정서가 강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의 정서에 반해 미 군정이 친일 세력을 잔존시키는 정책을 고수한 게 사건의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제주도의 특성이 반일 정서를 반영한 조직에 비교적 우호적인 지역임을 고려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진주 이후 이러한 정서에 반하는 질서를 강요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당시 남로당 세력이 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반일 정서를 강하게 반영하고 조직화할 수 있는 역량이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온존해 있었기에, 미 군정이 추진하는 5·10선거를 반대하는 세력의 선전과 활동이 비교적 쉽게 수용될 수 있는 지역이 됐다. 그래서 제주도에선 남로당이 주도하는 선거 반대 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참혹한 희생이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선거 반대 투쟁을 진압하는 과정이 제주도민의 정서에 어긋나는 비이성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이었다. 결국 막대한 희생자가 억울하게 발생하는 민족사적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4·3 사건을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까?
“‘단독정부 수립 세력’과 ‘통일정부 수립 세력’의 대결에만 초점을 두고 상대 진영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으로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다시는 외적인 요인에 의해 민족적 비극이 재발하는 일이 없도록 다짐하는 계기로 삼는 지혜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민족적 비극을 민족적 자산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지혜를 모을 때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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