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청구권협정 때 ‘개인 손배는 미해결’ 공감대 있었다”
당시 청 정무수석 민충식씨
1991년 국제포럼서 밝혀
“징용 해결” 일 주장과 배치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을 주도한 양국 협상 대표 사이에 해당 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점이 확인됐다.
외교부는 생산 후 30년이 경과한 1992년도 문서 등 총 2361권(36만여쪽)을 6일 공개했다.
문서를 보면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었던 민충식씨는 1991년 8월3일 일본에서 열린 국제포럼 발언에서 “당시 교섭 대표 간에도 동 협정은 정부 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인식의 일치가 있었다”며 “당시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무상도 동일한 견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국제법이 이제 바뀌고 있는바,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생각할 단계라고 본다”며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의 책임이 모두 해결된 게 아닐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이 같은 인식은 현재 일본 정부가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북·미가 첫 고위급 회담을 갖고 한·중 수교가 성사되면서 국제정세 격변이 일어난 1992년 외교 비사도 공개됐다.
1992년 한·미는 북한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한 상호 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소극적이었다. 아널드 캔터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은 그해 4월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의 서한에 대한 답신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국제 사찰과 남북한 합의에 따른 상호 사찰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미·북 고위급 정책 협의를 정례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 내 미군기지 사찰을 주장하며 영변 핵시설 외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사찰은 거부했다. 이듬해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제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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