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돌봄자, 노동시장 진입 어려워…‘공공부문 취업 우선권’ 등 맞춤형 일자리 만들기 고려할 때”
비공식 돌봄 실태조사 없어
지원정책 실제로 도움 안 돼
‘국가가 돌봄 책임’ 믿음 줘야
태어나면 돌봄을 받고 어느 순간에 누군가를 돌보고, 아프거나 나이 들면 돌봄을 받는다. 생애주기를 거치다 보면 누구나 돌봄 이용자이면서 돌봄 제공자가 된다.
지난달 28일 윤석열 대통령은 저출생 대책을 발표하면서 “국가가 아이들을 책임진다는 믿음과 신뢰를 국민께 줘야 한다”고 말했다. 대선 후보이던 2021년 10월엔 “국민의 부담을 국가가 함께 책임지고, 요양·간병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돌봄의 국가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국정 철학과 대비되는 게 지난달에 나온 ‘주 69시간 근무제’다.
아픈 아버지를 돌본 9년의 경험을 담은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2019)는 가족돌봄청년의 문제를 수면 위로 밀어올렸다. 이 책의 저자이자 돌봄청년 자조모임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의 대표 조기현 작가는 “최근 노동시간 논의에서 가족돌봄자의 입장은 소수 관점”이라고 했다. 이들의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목소리를 낼 창구가 없기 때문”이다. 조 작가는 “가족돌봄자가 일이나 학업을 병행하면서 시간 빈곤과 소득 빈곤, 그리고 관계 빈곤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조 작가를 만났다.
조 작가는 지난해 가족돌봄청년 7명의 인터뷰를 담은 <새파란 돌봄>을 통해 현 돌봄 정책의 문제와 대안을 고민했다. 이 책에서 그는 “노인장기요양 인정조사표에 주돌봄자의 상태를 파악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비공식 돌봄을 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조 작가는 “비공식 돌봄에 대한 실태조사가 없다 보니 몇 개 없는 지원사업도 위에서 추정해서 내려오는 정책들이 많고 실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짚었다. 예를 들어 치매 가족 휴가제는 2018~2020년 연간 이용률이 모두 0.2%를 넘지 못했다. 휴가기간(8일)에 요양보호사의 단기 방문이나 단기보호시설을 이용해야 하는데, 시간 맞추기나 시설의 사업 연계가 잘 안 돼 이용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는 “핀란드에서는 돌봄 이용자에 대한 필요 서비스 조사를 할 때 돌봄 제공자의 필요 서비스도 같이 조사한다고 한다”며 “유럽에서는 돌봄 이용자와 돌봄 제공자를 유기적 관계로 보는데, 유엔 장애인 권리협약이 정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사람으로서 돌봄 제공자를 인식한다”고 했다.
가족돌봄자들은 전일제 일자리를 얻기 어렵다. 주로 시간제 일자리에서 일한다. 일터에서 주는 복지는 누리기 어렵고, 임금은 낮을 수밖에 없다.
최근 조 작가가 만난 중장년 돌봄 제공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로를 겪고 있었다. 조 작가는 “가족돌봄자가 시간제 일자리라도 구해서 일하려고 할 때, 돌봄서비스를 이용하면 돌봄 인력과 시간 맞추기가 어렵고 돌봄기관에 맡겨도 돌봄 만족도가 떨어져 결국 다시 자기가 돌봄을 맡게 된다”며 “그러다 보면 가족요양보호사(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한 가족 돌봄자)를 하게 되는데, 급여 인정 시간이 하루 1시간(중증 치매 돌봄 1.5시간)뿐이라서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다”고 했다.
조 작가는 가족돌봄자가 시간 주권을 가질 방안으로서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제안한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을 언급했다. 모두가 누군가를 돌보는 돌봄 제공자인 동시에 노동자라고 가정하고 일자리를 고안하면 “아이 키우는 한부모, 영케어러, 아픈 가족을 돌보는 중장년이 더는 돌봄과 일의 균형을 맞추려 각자도생하고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은 기존 노동시간을 대폭 줄인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이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인 대안’ 아닐까. 조 작가는 “현실적으로 공공부문에서부터 돌봄 경력이 있는 사람, 돌봄하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는 맞춤형 일자리를 만들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돌봄이 필요할 때 노동시간을 조율하는 일터가 상상되지 않는 건 “그동안 가족돌봄자들이 (너무 길고 경직된) 지금의 노동시장에 진입이 어려워서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직무를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조 작가는 말했다.
돌봄을 사적 영역이라고 보고 돌봄자를 지원하는 정책이 역차별이라는 보는 시선도 있다. 조 작가는 “돌봄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누구나 돌봄을 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 작가는 돌봄 정책이 성평등 관점에서 추진돼야 한다고 했다. 조 작가는 “기존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서 가장이 가족을 부양한다는 가정하에 임금체계를 짜는 걸 가족임금제라고 한다. 임금에 가사와 가족 돌봄, 부양을 소득으로 보전하는 방식이었다”면서 “이제는 돌봄하는 노동자 개인에게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을 어떻게 조율해 보상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돌봄을 전담하는 구조를 깨기 위해선 성별 임금 격차를 없애고 돌봄 노동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직업으로서 유급 돌봄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고, 남성들이 이 직업에 더 참여해야 한다”면서 “비공식 무급 돌봄 노동자들에겐 일자리뿐만 아니라 간병수당과 같은 재정지원도 고려해야 한다. 소득지원 체계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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