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돌봄을 유연하게…노동자에게 ‘시간 주권’을 보장하자[시간 빈곤]
시간 빈곤은 개인 희생 요구
저출생 등 사회적 위험 촉발
노동시간, 복지 관점 접근을
직장에서 영업직으로 일하는 최모씨(43)는 최근 건강검진에서 대사증후군 위험도가 높다는 진단을 받았다. 혈압과 중성지방, 콜레스테롤 수치 등이 기준치를 넘어 건강관리가 시급했다.
하지만 거래처와 잦은 술자리 약속 때문에 식단 조절은 물론 운동 시간조차 내기 쉽지 않다.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도 생각해 봤으나 그동안 쌓아온 성과와 인맥이 사라지는 것뿐 아니라 당장 수당이 줄어들기도 해 선뜻 결심하기 어렵다. 지난 3일 기자와 만난 최씨는 “그동안 시간이 모자란다고 방치했던 건강을 회복하려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 한다는 충고를 의사에게서 들었다”고 말했다.
시간 빈곤은 돌봄의 위기에서 시작해 사회의 위기로 이어진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겪는 시간 빈곤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만성적인 저출생과 닿아 있다. 질병이나 장애, 노화 등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지원하면서 겪는 시간 빈곤은 개인의 기약 없는 ‘희생’을 요구한다.
개인이든 사회든 당장은 ‘시간’을 당겨쓸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간은 훗날 이자가 붙은 청구서로 돌아온다. 지금이라도 서둘러 사회 복지 차원에서 시간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질 낮은 일자리로 소득과 시간 빈곤이 악순환하는 문제를 가장 우려한다. 장시간 노동에 묶여 업무 능력과 숙련도를 높일 기회를 놓친 노동자는 미래에 더 나은 일자리를 잡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돌봄 인한 실업 땐 소득 빈곤
국가가 일정 부분 보전해야
가족 돌봄 휴가 땐 유급으로
소득 재분배와 연관시켜야
이승윤 중앙대 교수는 시간과 소득의 이중 빈곤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시간 주권’에서 찾았다. 이 교수는 ‘시간 비례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네덜란드를 예로 들었다. 네덜란드에선 완전한 실직 상태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주당 5시간 이상 감소해 소득이 줄기만 해도 실업급여를 받는다. 실업급여를 받고도 가구소득이 사회적 최저선에 미달하면 보충급여까지 받는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도 소득 감소 걱정 없이 가족 돌봄이나 직업훈련 등에 쓸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
이 교수는 “국내에선 대표적으로 여성·저숙련·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전문을 돌리듯 시간 빈곤과 소득 빈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일터에서부터 시간 주권을 가질 수 있게 법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는 일하는 사람들의 시간 주권을 법으로 보장한다. 2016년부터 탄력근무제법이 적용돼 현 고용주에게 6개월간 지속 고용된 노동자는 자신의 근무시간을 조정할 권리를 갖는다.
이런 제도는 가정 돌봄 시간을 보장하는 정책으로 연결된다. 육아기 아동을 둔 부모는 전면 휴직 대신 시간제 노동으로 전환을 선택할 수 있다. 돌봄을 위한 ‘부모휴가’는 하루 단위가 아니라 시간 단위로 쓸 수 있다. 또 아동이나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지원한 기간은 노동 경력으로 인정한다.
노혜진 강서대 교수는 돌봄 휴가 같은 시간 지원 대책을 ‘시간 재분배’ 정책 중 하나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간 재분배의 핵심은 보육이나 간병 등으로 시간 빈곤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계층의 시간을 공공영역에서 우선 보전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해당 직종에서 일할 기회와 소득까지 증가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선 돌봄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을 함께 개선해야 한다.
노 교수는 “소득 재분배와 같은 맥락으로 시간 재분배 차원에서 돌봄 가족 휴가를 법적인 유급휴가로 보장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돌봄이 각 가구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사회가 다 함께해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이 바탕이 돼야 성숙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 빈곤을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이 장시간 노동인 만큼 노동시간의 절대량을 줄이는 ‘주 4일제’ 역시 대표적인 시간복지 정책이다. 해외 각국에서는 이미 활발하게 도입·실험 중이다. 벨기에와 아이슬란드는 중앙·지방 정부 차원에서 주 4일제를 도입했다. 미국과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주 4일제를 도입한 기업의 비율이 커지고 있다. 2019년 미국 CBS가 미국인사관리협회(SHRM) 통계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미국 전체 기업 중 27%는 주 4일제를 도입 중이었다. 또 이 중 12%는 주 4일제에 근무시간을 주 32시간으로 줄이는 실험을 진행했다.
한국은 정부가 주당 노동시간 상한선을 현행 52시간에서 상향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2021년 기준 연간 191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199시간 더 많았다. 한국은 앞서 10년간 노동시간을 10.3% 줄이고도 여전히 OECD 38개 회원국 중 5위에 올라 있다. 이 교수는 “선진국에서는 주 4일제 실험이 속속 이어지면서 노동시간을 전반적으로 줄이는 추세인데 한국의 정책 방향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며 “기업이 장시간 노동하는 문화를 바꾸도록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제도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 빈곤을 해결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명목상의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업무 시간 뒤 ‘보이지 않는 노동’도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해외 각국의 ‘연결되지 않을 권리’ 정책은 정규 근무시간 외에는 직장에서의 전화·메시지·e메일에 답할 필요가 없도록 보장하고 있다. 노 교수는 “퇴근 후에도 업무에 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시간이 파편화되면 정신건강에도 부정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이런 ‘보이지 않는 노동’에 들어가는 시간이 계속 일정량 투입되는 상황에서 명시적인 노동시간까지 늘어나면 실제 노동시간의 상한선은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리즈 끝>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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