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한·일협정때 ‘개인 청구권 미해결’ 암묵적 동의”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을 주도한 양국 협상 대표가 해당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인식했다는 증언이 비밀 해제된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협정을 맺을 당시 한·일 두 나라의 인식은 강제동원 배상 책임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 판단과 큰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외교부가 6일 공개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보면, 1991년 8월3일부터 이틀간 일본 도쿄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후 보상 국제포럼이 열렸는데, 이 행사에는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이었던 민충식씨가 참석했다.
주일대사관이 정리한 민씨의 당시 포럼 발언을 보면, 그는 “1965년 소위 ‘청구권’ 협정에 대해 한·일 양국 간 및 국민 간 인식의 차가 컸다”며 “또 개인의 청구권이 정부 간에 해결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고 했다. 그는 이어 “당시 교섭 대표 간에도 동 협정은 정부 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인식의 일치가 있었다”며 “당시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무상도 동일한 견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현재 한·일 두 나라의 인식과 다소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고,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제3자 변제안)을 언급하며 “청구권 협정은 한국 정부가 개인 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한다고 돼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날 공개된 외교문서 2361권, 36만여쪽에는 1992년 한-중 수교, 북-미 접촉 등 냉전 해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숨 가쁜 비화도 담겨 있다.
1992년 북한, 주한미군 존재 첫 인정
1991년 12월 소련이 망하고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북한은 남북관계와 대외관계 개선에 나섰다. 1992년 1월 첫 북-미 고위급 회담도 뉴욕 주유엔 미국대표부에서 열렸다.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과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만났고, 북한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안정의 요소”로 인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미국의 평가가 외교문서에 담겼다. 그동안 학자들이 ‘1992년 김용순 부장이 미국에 주한미군을 인정했다’고 주장했지만, 외교문서를 통해 관련 내용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중국, 한-중 수교로 ‘대만 단교’ 성과 기뻐해
한-중 수교(1992년 8월24일)를 둘러싼 중국과 대만의 엇갈린 속내도 드러났다. 특히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한-중 수교가 역내 평화를 위한 결정이라고 강조했으나 비공식 석상에선 ‘한-대만 단교’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후카다 하지메 일본 사회당 의원은 1992년 9월3일 주일한국대사관 참사관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공식 석상에서는 한-중 수교에 대해 발언을 자제하고 태연한 척했으나, 식사나 주연 석상에서는 한국과 대만의 단교에 크게 특히 기뻐했다”고 전했다.
전두환, 87년 ‘호헌’ 미국에 지지 호소 실패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13일 직선제 개헌 논의를 미루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기 직전까지 미국의 지지를 얻는 데 집중했으나 실패했다. 담화 하루 전날은 일요일인데도, 최광수 외무장관은 제임스 릴리 주한미대사를 만나 “야당의 분열과 대립, 비타협적인 태도로 국회에서의 합의 개헌은 불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릴리 대사는 “왜 이 시점에 그런 결단을 발표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가장 중요한 열쇠는 민주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두환씨는 1987년 5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호헌 지지를 요청했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정치범 석방과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며 전씨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남북한 외교관 소말리아 동시 철수
영화 <모가디슈>(2021)로 유명해진 1991년 ‘소말리아 남북 공관원 탈출’ 외교전문도 처음 공개됐다. 당시 외무부가 작성한 ‘주소말리아 남북한 대사관원 동시 철수’ 문서를 보면, 강신성 주소말리아 대사는 공항에 피신해 있던 김용수 북한대사 일행을 만나 공동 대피를 제안했다. 문서에는 “북한 공관원들도 우리 공관원들과 함께 철수할 수 있도록 이태리(이탈리아) 정부와 교섭한바 이에 따라 1월12일 이태리 군용기편으로 양쪽 공관원들이 루마니아 대리대사와 함께 케냐의 몸바사 공항으로 철수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신형철 기자 newiron@hani.co.kr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수세 몰린 김기현, 돌연 “의석수 30석 이상 감축 가능”
- ‘퐁당 마약’ 음료에 피싱 접목…“학원가 노린 범죄 충격”
- ‘후쿠시마 오염수’ 자료 들고 일본 찾은 민주당…주호영 “한심”
- 무너진 정자교…성남시장 ‘중대시민재해’ 1호로 입건되나
- 진보당, 지방의회 넘어 국회 입성…내년 총선서도 성과 낼까
- “패딩 괜히 넣었나”…비 그친 주말, 영하권 꽃샘추위
- 한국 건설 역사의 영원한 오점, 평당 1만1천원 ‘시민아파트’
- ‘학폭 배상’ 허사 만들고…연락두절 권경애 변호사 로펌 탈퇴
- ‘권경애 불출석’ 배상금 날린 피해자…소송비용까지 물어낼 판
- 땅에 닿는 순간 꽁꽁…‘얼음비’ 내린 퀘벡 곳곳 정전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