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잠수함, 무기밀매, 간첩단… 핵 위기 앞서 남북 신뢰는 무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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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은 1991년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지만 이후 첩보전이 가열되면서 상호 신뢰는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핵잠수함과 무기밀매, 간첩단 등 온갖 의혹과 공안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남북은 서로 트집을 잡으며 긴장을 고조시켰고, 북한 핵위기가 본격화하면서 균열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확산됐다.
이후 1993년 2월 팀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되자 북한이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남북관계는 파국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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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北 무기밀매 동향에 촉각…美, "남북대화 때 언급" 요청
남북, '남조선노동당 사건' 두고도 외교전…상호 신뢰 무너져
남북은 1991년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지만 이후 첩보전이 가열되면서 상호 신뢰는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핵잠수함과 무기밀매, 간첩단 등 온갖 의혹과 공안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남북은 서로 트집을 잡으며 긴장을 고조시켰고, 북한 핵위기가 본격화하면서 균열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확산됐다.
외교부가 6일 비밀해제해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1992년 9월 "진해에 미국 핵잠수함을 주둔해 운영하고 있다"는 진보월간지 '말'의 보도를 근거로 대남 압박수위를 높였다. 손성필 러시아주재 북한대사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진해 소모도에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남한 내 전술핵무기를 모두 철수했다는 미국 대통령의 발표는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북한의 공세를 부인했다. 하지만 곧이어 중부지역당 사건이 터졌다. 국가안전기획부는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92년 10월 "남로당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남파된 대남공작 지도부인 이선실이 재야와 운동권 학생, 야당 인사 등과 접촉해 지하조직을 결성했다는 것이다.
메가톤급 파장을 불러온 사건이지만, 정부는 북한과 대화와 협력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1992년 10월 주미대사관의 박흥신 서기관은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밥 칼린 동북아 과장에게 "이번 사건에도 불구하고 기존 남북 간 합의사항은 계속 이행해나간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같은 날 외무장관은 재외공관장들에게 "남북관계의 진전에는 수많은 난관이 예상된다"며 대북정책의 한계를 시인했다.
민감한 시기에 북한의 무기밀매 동향이 포착돼 불신을 키웠다. 1992년 8월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은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그러면서 대표단 방북에 합의했는데, 여기에는 '카후타 핵연구소' 박사도 포함돼 있었다. 핵과 미사일을 매개로 한 파키스탄과 북한의 군사협력이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이 상당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판단은 남북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 국무부 퀴노네스 북한담당관은 한국이 공동으로 대응해줄 것을 촉구했다. 남북대화 채널을 통해 북한과 파키스탄 간 미사일 기술 이전을 자제해달라고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
반면 당시 외교부 외교정책기획실장은 "현시점에서 남북한 양자의 문제로 비화해 남북의 제반 대화채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남북간에는 아직 신뢰가 남아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핵시설 사찰을 놓고 남북미가 현격한 입장 차를 보이면서 남북 고위급 회담은 파국으로 끝났다. 1992년 초까지만 해도 한미는 대규모 야외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를 중지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플루토늄 보유량을 축소 신고하고 핵시설을 은닉하자 한미연합훈련으로 맞섰다.
북한은 거세게 반발했다. 1992년 11월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한 허종 주유엔 북한 차석대사는 국무부의 한국과장을 만나 "훈련 재개를 재고해달라"고 수차례 요구했다. 연형묵 북한 총리가 우리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는 남한 간첩단 사건을 집권 민주자유당의 "정치모략극"이라고 규정하는 한편,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이 꾸며낸 주장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후 1993년 2월 팀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되자 북한이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남북관계는 파국을 피할 수 없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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