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전기가스료 인상억제, 미래에 짐 씌우기
지난 달 31일 열린 당정협의회에서 전기·가스 요금 조정안 발표가 미뤄졌다. 러-우 전쟁 여파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으나, 이를 요금에 적절히 반영하지 못해 한전과 가스공사의 적자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자 정부는 올 초부터 요금 인상 필요성을 밝혀 왔다.
그러나 이번에 결정이 미뤄지면서 사실상 요금이 동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도 나온다. 전기·가스 요금은 국민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며 국가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므로 당정이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지금 요금 동결로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 비용을 누구에게 전가하고 있는지를 되짚어 봐야 한다.
두 가지를 상기해 보자. 첫째, 우리나라는 지난해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을 요금에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전쟁 여파로 평시 대비 30배 이상 올랐던 유럽 천연가스 가격만큼은 아니더라도 한국의 천연가스 수입 지표인 JKM 천연가스 가격은 지난해 8월 평균 MMBtu당 53.95달러, 10~12월 30달러 안팎을 기록했다. 2019년 8월 JKM 가격이 4.67달러, 10~12월 5~6달러 내외였으니 최소 6배, 최대 10배 이상 올랐다. 반면, 우리나라의 2019년 8월 육지 평균 전력 가격 및 주택용 도매 도시가스 요금은 각각 83.93원/kwh과 14.71원/MJ, 지난해 8월에는 각각 196.02원/kwh과 15.69원/MJ이었으므로 국제 가격과 얼마나 괴리가 컸는지 알 수 있다.
둘째, 국내 전력·가스 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두 공기업은 가격 억제로 인한 대규모 영업 손실을 해소해야 하므로 미래를 위한 투자에 적극 나서지 못한 채 긴축과 자산 매각에 힘쓰고 있다.
이에 반해 주요 선진국들은 REPowerEU(유럽),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미국), 공급망 대책을 위한 국내 투자 촉진 사업비 보조금(일본) 등으로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우리보다 훨씬 안정적인 산업 기반을 보유하고 이른바 에너지 패권이나 기술 경쟁력을 가진 나라들이 왜 투자에 더 적극적일까? 바로 에너지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혁신과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에너지 공급 체계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투자가 필요한지를 살펴보면, 먼저 전력·가스 인프라 혁신과 유지 관리 투자가 필요하다. 이는 노후화된 송배전망과 가스관로를 교체·개선하는 데 급급한 투자가 아니라, 탄소중립 및 에너지 안보 강화를 위해 전력 수요 증가와 변동성 재생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전력망과 수소 등 미래 에너지원을 위한 인프라 투자를 의미한다. 또한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 투자가 필요하다. 재생에너지 확대, 수소경제, 차세대 원자력, 이산화탄소 포집·이용·저장 등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 체계는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비용이 수반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 구축을 해외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국내 산업 생태계 육성과 연구개발 투자가 필수적이다.
아울러 에너지 효율과 수요 관리를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수요 관리로 소비량을 줄이는 것은 전 세계에서 첫 번째 연료(first fuel)로 불릴 정도로 우선순위가 높은 탄소중립 달성 수단이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이 낮게 유지된다면 에너지 효율 투자를 할 유인 자체가 없어진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안보를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 에너지 안보는 국방, 식량 안보와 마찬가지로 국민 안위와 직결되며 안보 강화는 언제나 비용이 수반된다.
이러한 투자들이 이어진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우선 기후 변화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우리나라가 선언한 2050 탄소중립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또한 100% 수입에 의존하는 화석연료에서 벗어나 국내 생산 에너지원의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으며,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 구축 과정을 국내 산업이 뒷받침하도록 지원한다면 산업 생태계 강화와 수출 산업 육성, 신성장동력 확보 기회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된다.
결국 전기·가스 요금 인상은 단기적으로 부담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다양한 측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지금 당장 요금 부담을 늘리는 것을 누가 좋아할까? 그러나 우리가 요금 현실화를 미루면 결국 우리 미래를 담보로 더 커다란 위험을 쌓아 다음 세대에 큰 짐을 떠넘기게 된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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