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한겨레 2023. 4. 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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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중 하나다.

한국인에게 '밥 먹자'는 말은 수많은 맥락을 내포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 여주인공 이영애가 했던 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가 아직 회자하는 이유도 '밥 먹자'는 말이 함의하는 다중성 때문이다.

고심 끝에, 가족이 유일하게 함께 있는 시간인 '밥 함께 먹는 행위'를 집의 중심에 두자고 제안했고, 건축주 부부는 무릎을 치며 그 자리에서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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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크리틱

게티이미지뱅크

[크리틱]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보이지 않는 도시> 저자

“언제 밥 한번 먹자”

한국인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중 하나다. 한국인에게 ‘밥 먹자’는 말은 수많은 맥락을 내포한다. 이성에게 작업 걸 때도,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때도, 헤어짐이 아쉬울 때도 이 말을 사용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 여주인공 이영애가 했던 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가 아직 회자하는 이유도 ‘밥 먹자’는 말이 함의하는 다중성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수없이 많은 다양한 문화와 문화재를 골라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는 유네스코가 유독 조심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견의 여지없는’ 공평성이다. 힘센 나라의 입김 때문에 지정했냐는 다른 나라의 볼멘소리를 피하기 위해 나라 간 다툼의 소지가 있는 문화에 관해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런 유네스코가 2010년 프랑스의 미식문화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했을 때, 자국 음식에 자부심이 큰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었다. 프렌치 퀴진이 전 세계에 고급요리로 알려져 있고, 세계 최고 권위의 맛집 가이드인 미슐랭 가이드의 종주국이고, 두말하면 입 아픈 프랑스 와인의 산지인 만큼 당연한 것 아니냐 싶지만 ‘프랑스는 등재되는데 우리는 왜 못하냐’는 이탈리아의 입을 막은 것은 ‘음식’이 아니라 ‘미식문화’라는 평가 대상이었다. 역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사람마다, 나라마다 달라질 음식평가는 주관성과 상대성이 강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니, 애초부터 공적 국제기관에서 우열을 매길 수 없는 분야다. 한국의 김장이 2013년 무형문화유산에 선정됐을 때 한국인 대부분은 우리 김치 맛이 인정받았다고 뿌듯해했지만, 유네스코의 등재 이유에는 김치가 최고의 요리라는 얘기는 없었다. 단지 김장이라는 문화가 현대사회에서 가족 협력 및 결속을 강화하는 기회라는 가치를 인정했을 뿐이다.

그리고 무려, 구체적인 국가 이름을 대놓고 명기한 ‘프랑스 미식문화’ 선정이유에도, 바게트나 치즈 같은 특정 음식은 하나도 언급되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맛있게 먹고 마시는 기회를 나누는 잔치 같은 식사로서, 이런 식사는 단란함과 맛의 즐거움, 인간과 자연 산물과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의 가치를 인정했다. 가족과 인간관계의 유대를 증진할 목적으로 음식을 이용한 ‘소통의 방식’을 주목한 것이다. 한국인이 낯설어하는 최소 4가지로 나뉜 코스도 다양한 음식을 최대한 오래 함께 나누기 위해 고안된 방식이다. 우리에겐 ‘술’로 알려진 와인도 각각의 코스요리를 가장 맛있게 즐기기 위해 발전된 하나의 ‘음식’이다. 동양이건 서양이건 사람은 함께 밥 먹을 때 가장 즐겁다.

빡빡한 학원시간 때문에 편의점 음식이 더 익숙한 아이들, 늦은 야근에 얼굴 마주할 시간도 별로 없는 부부…. 이런 현실에서 가족이 함께 음식을 즐기는 문화라니 꿈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몇년 전 한 젊은 부부가 주택설계를 의뢰하며 한가지 바라는 점을 얘기했다.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한 집을 짓고 싶어요.” 필요한 방의 개수나 높은 거실 층고 같은 기능적인 요구는 그 자리에서 해결책이 나온다. 그런데 가족이 저녁을 함께 보내려면 집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막연하다. 고심 끝에, 가족이 유일하게 함께 있는 시간인 ‘밥 함께 먹는 행위’를 집의 중심에 두자고 제안했고, 건축주 부부는 무릎을 치며 그 자리에서 받아들었다. 텔레비전만 보는 거실 대신 오픈바가 중심이 된 주방이 집에서 제일 좋은 남쪽 공간에 자리 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의뢰인은 주방이 집의 중심이 되자 가족이 자주 모여 함께 요리와 식사를 한다는 피드백을 전해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혼자 즐거운 텔레비전은 가족을 흩어지게 하지만, 맛있는 음식은 모두를 오랫동안 모이게 한다. 가족 간의 저녁이 있는 삶을 바란다면 요리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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