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강제성 첫 인정' 고노담화 이전 '서해사업' 있었다

박경은 기자 2023. 4. 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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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으로 한일 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았던 1992년 한일 정부의 물밑 교섭 내용이 공개됐다.

양국은 당시 '서해사업'이라는 명칭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방일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노 전 대통령의 방일 이후 국내에서는 반일 감정에 기초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으나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최초로 인정한 '고노 담화'를 1993년 8월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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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1992년 외교문서' 공개
한중 수교하자 北 지도부 충격 등
사상 첫 북미 고위급 회담도 담겨
노태우 전 대통령과 미야자와 기이치 전 일본 총리가 1992년 11월 8일 일본 교토에서 만나 회담하기에 앞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경제]

냉전 종식으로 한일 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았던 1992년 한일 정부의 물밑 교섭 내용이 공개됐다. 양국은 당시 ‘서해사업’이라는 명칭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방일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노 전 대통령의 방일 이후 국내에서는 반일 감정에 기초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으나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최초로 인정한 ‘고노 담화’를 1993년 8월 발표했다.

외교부는 6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30년 경과 비밀 해제 외교문서’를 일반에 공개했다. 1992년도 외교문서를 보면 이상옥 전 외교부 장관은 10월 14일 오재희 전 주일 한국대사에게 ‘서해사업’이라는 제목의 친전을 보냈다. 이를 통해 이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 방일 추진 계획 등을 일본 측에 전달하고 구체적인 일자 등을 확정하라고 지시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8일 노 전 대통령은 교토를 방문해 미야자와 기이치 전 일본 총리와 회담했다.

국내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임기 말 방일을 두고 부정적인 여론이 쏟아졌다. 한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음에도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현안에 대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게 비판의 주요 내용이었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가 1997년 사망한 점도 여론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1993년 8월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이 있었음을 사상 최초로 인정했다.

외교가에서는 올해 3월 한국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 이후 한일정상회담이 이뤄진 상황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고 있다. 다만 우리 정부가 앞으로 고노 담화와 같은 일본 정부의 추가 사죄 표명을 이끌어내려면 일본 관계 당국 및 재계가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보다 긴밀히 협의하고 미국 등 동맹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92년 8월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이상옥(왼쪽) 당시 외무부(외교부 전신) 장관과 첸치천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번 외교문서에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을 이끈 양국 협상 대표가 당시 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는 우리 측 당국자의 전언도 담겼다. 이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은 완전히 소멸됐다’는 현 일본 정부의 인식과 차이가 있다.

또 노태우 정부가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수교하기 직전 대만에 단교 방침을 통보한 내용도 이번 문서에 포함됐다. 한국이 1990년 러시아에 이어 1992년 중국과도 수교하자 북한의 내부 충격이 상당했다는 일본 정치인의 발언도 담겼다. 이 밖에 북미가 1992년 1월 뉴욕에서 사상 처음으로 고위급 회담을 개최한 내용도 들어 있는데 한미는 당시 남북 간 상호 핵 사찰을 북미 관계 개선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지만 북한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기술됐다.

고(故)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김용순 전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 모습. 연합뉴스
박경은 기자 eu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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