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끄지 못하는 두 가지, 아들 휴대전화와 엄마 방 전등
태권도·축구 잘하고 속정 깊던 ‘내 사랑 아들’… 살갑게 챙겨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깊은 그리움으로
이남훈씨가 서울에 놀러 가기 전날 밤, 엄마 박영수(56)씨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집에서 밤늦게까지 사골국을 끓였다.
“아들이 일하다가 허리를 좀 다쳤는지 혼자 끙끙거리더라고요. 병원에 가보래도 괜찮다고만 해요. 그래서 소 사골을 사서 밤새 끓였어요. 아들이 사골국에 밥 말아서 김치랑 먹는 걸 좋아해요. 사골은 온종일 고아야 하잖아요. 다음날 저녁에 같이 먹으려고 했죠. 그런데 오후 늦게 남훈이가 서울에 나간 거예요.”
엄마는 정성껏 끓인 사골국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첫 제상에 오르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삼우제(장례 사흘 뒤 첫 제사) 때 한 그릇 떠다가 수목장 묘비 앞에 밥이랑 같이 놓았어요. 이제 더는 사골국을 끓일 자신이 없네요.”
엄마의 마지막 사골국
2022년 10월29일은 주말(토요일)이었다. 서울 이태원은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남훈도 여자친구와 함께 생전 처음 이태원을 찾았다. 그것이 스물아홉 삶의 마지막 나들이가 되고 말았다. “새벽 3시쯤인가 잠자다가 깼어요. 밖에서 누군가 막 울면서 저를 부르는 거야. 아들 친구가 사색이 돼서 울면서 ‘남훈한테 일이 생겼다’고 그래요.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났는데, 남훈이 순천향병원(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다는 거예요. 곧바로 남편하고 차를 몰았죠.”
그다음부턴 이미 알려진 대로 모든 일이 비극이자 엉망진창이었다.
“새벽 4시 조금 넘어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는데 다들 모른다고만 해요. 마냥 기다렸는데, 이번엔 (희생자들을) 인근 주민센터로 옮겼대요. 다급한 마음으로 가봤더니 거기서도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유가족 지원센터는 실종신고부터 하래요. 점심 무렵에야 사위한테 ‘남훈이 지금 삼육병원(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삼육병원으로 가면서도 저는 아들이 다쳐서 치료받고 있을 거라고만 믿었어요. 그런데…, 아들이 거기 눈감고 누워 있는 거예요. 더 기가 막힌 게, 아이를 완전히 벗겨가지고 시트를 덮어놨더라고. 그게 말이 돼요? 아이가 사망했으면 있는 그대로 부모한테 인계해줘야 하잖아요.”
남훈은 얼굴이랑 온몸이 너무 깨끗했다. “어디 하나 멍든 데도 없어요. 그래서 더 믿기지 않고 속상하죠. 그 많은 아이들 옷 벗기는 시간이었으면 유류품이나 휴대전화에서 전화번호를 찾아 어디든 연락했어야지 아이들 옷은 왜 벗겼냐고요. 그 와중에 경찰이 와서 ‘부검하겠느냐’고 물어봐요. 아이 아빠가 ‘왜 부검을 하느냐’며 거부했죠. 검사의 확인증을 받고 나서야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어요.”
여동생 보험 들어주고 엄마에겐 아가씨 옷 선물
남훈은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태권도와 축구 선수였다. “아이를 그쪽으로 키워주려면 부모가 따라다녀야 하고 경제적인 뒷받침도 돼야 하는데, 저희는 그때 먹고사는 게 바빠서 그럴 여력이 없었어요.” 박씨 부부는 작은 침구류 공장을 운영한다. 집은 공장에 붙어 있다. 젊어서는 일하느라 늘 바빴다. 엄마는 아이들이 한창 성장할 때 살갑게 챙겨주지 못한 게 늘 아쉬웠다. 특히 아들이 황망하게 떠나간 뒤로는 그게 너무 미안하고 죄책감으로 남는다고 했다.
남훈은 지역의 한 대학교 체육과에 진학했지만, 형편상 운동 쪽으로는 전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돈벌이에 나섰다. 대학을 졸업한 뒤 스물세 살 무렵부터 집에 들어와 살았다. 처음엔 골프장에서 ‘알바’를 했고, 조금 지나서는 인테리어 시공업체에서도 일했다. 거의 매일 밤 12시가 넘어서야 지친 몸으로 집에 왔다. 마냥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남훈은 한때 헤어졌던 여자친구와 2022년 봄부터 다시 만났다. “둘이 예쁘게 잘 만났어요. 사진도 많이 찍고 행복해했죠.” 그해 10월, 남훈은 여자친구의 제안으로 이태원 나들이를 했다가 참사를 만났다. 남훈의 여자친구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제가 그랬어요. ‘너라도 살아와서 다행이다. 만일 네가 잘못되고 남훈이가 살아왔더라도 아마 우리 아들 성격에 온전히 살기 힘들었을 텐데…’라고.”
남훈은 말수가 별로 없고 내성적이었다. 아프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편이었다. 대신 속정이 깊었다.
“막내딸(남훈의 여동생)과 일곱 살 터울이에요. 아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동생 이름으로 보험을 하나 들어주고 보험료를 내주고 있었더라고요. 몇 년 전에는 제 생일 선물로 바지와 블라우스를 사왔는데, 젊은 아가씨들 스타일이에요. 아들이 그래요. ‘엄마, 맨날 일하는 사람처럼 작업복 차림만 하지 말고 이제 옷도 좀 예쁘게 입고 다녀요.’ 코로나19 봉쇄가 풀리면 해외든 제주든 가족여행 가자고 했는데 이렇게 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옆에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토닥여줄걸. 얼굴 한 번 더 만져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으면…
엄마의 휴대전화에도 식구들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다. ‘남편’ ‘큰 여우’(큰딸), ‘작은 여우’(막내딸), 그리고 ‘내 사랑 아들’(남훈). “아들한테만 유일하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그만큼 저한테는 애틋한 아이였거든요.” 엄마는 지금도 침대 머리맡에 아들의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켜두었다. “흔적이 사라지는 게 싫잖아요. 세면장에는 아들 쓰던 칫솔이 그대로, 신발도 현관에 그대로 있어요. 아들 방은 삼우제 끝나고 나서 아직껏 한 번도 안 열어봤어요.”
엄마가 끄지 못하는 게 또 하나 있다. 방의 전등. “지금이라도 아들이 ‘엄마, 나 왔어. 배고파’ 하면서 들어올 것만 같아. 우리 엄마들은 아이들이 별이 됐다고 그러잖아요. 깜깜한 밤에 엄마 방문에 불빛이라도 켜져 있으면 아들이 내려다볼 것 같아요.”
‘그날’ 이후 남훈이 딱 한 번 엄마에게 온 적이 있다. 참사 스물넷째 날인 2022년 11월22일. 이날 오전 희생자 유가족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도움으로 첫 기자회견을 했다. “전날 밤에 제가 답답하고 원통한 마음을 끄적인 메모를 유가족 대표에게 사진 찍어 보내줬어요. 그랬더니 기자회견 때 낭독해달래요. 국민 앞에 발표하는 글이라 가다듬다가 새벽 4시쯤 깜박 잠들었어요. 그런데 아들이 꿈에 나타나서 ‘엄마, 빨리 가자’고 깨우더라고요.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으면 꿈에 엄마한테 왔을까 싶었죠.”
그 뒤로 남훈은 아직 엄마에게 오지 않았다. “아이들이나 부모한테는 너무 억울한 죽음인데, 그 억울함이 조금이라도 해소된 느낌이 들면…, 그때가 되면 다시 올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이 남긴 숙제를 하기 위해 힘들어도 분향소를 지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거죠.”
엄마들은 오늘도 가슴속 불을 끄지 못한 채 지친 몸을 누일 테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힘내서 모일 것이다. 별이 된 아이들이 다시 올 때까지.
<한겨레21>은 참사 한 달째부터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었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21>은 기록한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우리 사회의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다웠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 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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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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