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까지 ‘마이웨이’…윤 대통령의 민생 골든타임은 흘러간다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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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정ㅣ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일종의 ‘마이 웨이’ 선언으로 읽힌다. 거대 야당의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고심과 결단”(대통령실 관계자)이라지만, 야당과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불어민주당은 양곡법 재의결 추진은 물론 방송법·간호법·노란봉투법 등 쟁점 법안까지 통과시켜 윤 대통령을 계속 시험에 들게 할 태세다. 다수당 협조 없이는 정부 중점 법안 처리는 불가능한데도, 윤 대통령은 야당과 대화 한번 없이 끝내 ‘손절’하는 길을 택했다. 국회 의석수 변동이 생길 내년 총선까지 윤 대통령이 입법을 통해 정책을 추진하는 일은 사실상 올스톱됐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지난해 민주당이 ‘이재명 1호 법안’으로 양곡법 개정안을 냈을 때부터 예견된 수순이었다. 지난해 9월 민주당이 개정안을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위원회에서 단독 처리했을 때, 이미 권성동 당시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법안을 처리할 경우, 대통령께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건의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이후 정부·여당은 ‘쌀 매수 의무화’에 반대하면서도 대안을 내놓은 적은 없다. 김진표 국회의장의 두차례 중재안도 무시했다. 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며 “제대로 된 토론 없이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유감스럽다”고 했는데, 반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협상 가능성조차 차단한 쪽은 대통령실이다.
윤 대통령이 이번 거부권 행사가 가져올 후폭풍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야당 입법→대통령 거부권→야당 반발이라는 갈등의 무한 루프를 선택한 것은 윤 대통령의 총선 전략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국정 발목을 잡는’ 야당과 싸우면서 지지층을 결집하겠다는 것, 그리고 총선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적 행보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여권에선 50%대의 총선 투표율을 고려할 때 30% 정도인 고정 지지층만 투표장에 나온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호남과 영남을 횡단한 대통령의 지역 일정 역시 선거 유세를 연상시킨다. 단순 행사 참석을 넘어 하룻밤을 보내고, 민심 탐방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명분 삼아 가는 곳마다 투자 약속을 잊지 않는다. 지역 방문 일정은 총선을 앞두고 더 자주 진행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의 행보는 지지층을 향해 있다. 대구 서문시장 100주년 기념식엔 참석하고 제주 4·3 추념식에 불참한 것은 극우 지지층 눈치 보기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앞서 노동·교육·연금 개혁을 강조했지만, ‘표 떨어지는’ 교육·연금 개혁은 뒷전으로 미루고 노동개혁 명목 아래 노조 때리기로 지지층의 환호를 받는다. 여당은 부동층인 엠제트(MZ) 표심을 얻겠다며 ‘1천원 학식’ 등 이벤트성 정책에 골몰한다.
총선에서 패배하면 곧바로 식물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윤 대통령의 공포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쓴맛’을 본 윤 대통령에게 총선 승리는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한 절실한 과제일 것이다. 여기에 빠진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책무다. 윤 대통령이 취임 뒤 자신만의 의제를 제시한 것은 있는지, 꾸준히 정책을 추진한 것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지난 1년간 야당과 기싸움을 벌였고, 총선까지 남은 1년은 아예 ‘대결 정치’를 공식화했다. 윤 대통령은 거대 야당의 발목잡기를 탓하지만, 그런 야당을 설득하기는커녕 말 섞기조차 거부한 것은 윤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이후 ‘날개를 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지 모르나, 여당이 압도적 우위에 서지 않는 이상 야당과의 협치는 그때도 불가피하다. 다만 야당이 저물어가는 권력에 협력할 유인은 지금보다 더욱 없을 것이다.
야당이 의석수로 밀어붙이는 실력행사 역시 비판받을 지점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야당의 도움이 필요한 쪽은 집권 세력이다. 당장 연말에 처리해야 할 정부 예산안이든 정부 제출 법안이든 야당의 협조 없이 통과시킬 전략은 있는지 궁금하다. 윤 대통령의 이번 거부권 행사가 문제적인 것은 앞으로 1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정치 포기’ 선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이 취임 초 대통령의 ‘골든타임’인데, 윤 대통령에게는 총선에 일로매진하는 선거대책위원장의 모습만 뚜렷해진다. 국민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았지, 국민의힘 선대위원장을 뽑은 건 아니다. 5년 임기 대통령의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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