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이 미처 못 그린 인물들 화폭에 담아야죠"

이효석 기자(thehyo@mk.co.kr) 2023. 4. 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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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형모 화백 딸 정진미씨
역대 대통령 초상화 그렸던
인물화 거장 부친 최근 별세
아버지에게서 그림 배우고
19년간 같이 협업해와
손녀 해담씨도 獨서 회화수업
"3代 전시회 여는 것이 꿈"
2019년 전시회 당시 정진미 화백과 그의 작품 '아버지의 초상'.

정진미 화백(60)의 눈에 비친 1979년 10월 26일 이후의 시곗바늘은 바삐 돌아갔다. 당시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이튿날인 27일 오전 청와대 관계자가 집에 찾아왔고, 아버지인 고(故) 정형모 화백은 박정희 대통령 국장(國葬)에 쓰일 영정을 주문받았다. 가로 151㎝에 세로 215㎝, 150호짜리 캔버스에 사다리를 동원해 일주일간 철야 작업한 끝에 정형모 화백은 국장 하루 전날(11월 2일) 그림을 완성했다. 대한민국 첫 국장의 운구 행렬 맨 앞에 선 대형 영정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정형모 화백은 전두환·김대중·이명박 등 역대 대통령 초상화와 지미 카터·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등을 그린 한국 인물화의 거목이다.

정형모 화백의 둘째 딸인 정진미 화백은 지난 2월 3일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정형모 미술아카데미'에서 만난 정 화백은 "아버지가 미처 그리지 못하고 남겨두신 인물들을 화폭에 담겠다"며 "선친의 작품과 화가인 제 딸의 작품을 함께 품는 3대(代) 전시회를 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정형모 화백의 손녀 이해담 씨(29)는 현재 독일의 한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며 할아버지에 이어 회화를 공부하고 있다.

정진미 화백의 인생 경로는 한 번 크게 바뀌었다. 그를 돌려세운 건 평생 가난한 화가를 뒷바라지한, 돌아가신 어머니 박연희 씨였다. 그는 "2004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지금이라도 아버지 화실에 나가 도우면서 미술로 재능을 발휘하라고 말씀하신 게 마음에 남아 이 길로 뒤늦게 들어섰다"고 회고했다. 정 화백은 아버지 화실에 다니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해 일취월장했고, 각종 그룹전과 개인전을 열며 인물화가의 길을 걸었다.

최종건 SK그룹 창업주의 아들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의 격려는 인물화가로 서는 데 큰 힘을 줬다. 최 전 회장은 정형모 화백이 1974년에 그린 최종건 창업주 초상화에 감동했다. 2009년 수소문 끝에 신촌에 있는 화실에 찾아와 다른 그림을 부탁하기도 했다. 당시 정진미 화백의 그림을 보고 "더 좋은 작품을 그려내 아버지를 뛰어넘는 화가가 되는 게 부친을 도와주는 것 아니겠냐"며 용기를 줬다.

19년간 손발을 맞춰온 부녀의 협업이 눈부셨던 건 2008년 부시 대통령 방한 때다. 정진미 화백은 부시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작품을 청와대에 보내 초청받는 일을 성사시켰다. 청와대에서 만난 부시 대통령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그림도 안 보고 정형모 화백을 와락 껴안았다고 한다. 2018년에는 부녀 전시회 '인물화의 계보를 잇다'를 열기도 했다.

생전에 아버지는 딸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는 "아버지는 칭찬에 후한 분은 아니었다"며 "다만 제가 없는 곳에서 화가 동료들에게 나를 칭찬하고 다녔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고인은 딸의 그림 중 자신을 그린 '아버지의 초상'을 가장 좋아했다. 미소가 참 부드럽게 표현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 화백이 꼽는 인물화의 매력은 한 인간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 같은 친근함을 준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길게는 1~2년까지 한 인물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성격이나 성품까지 느껴질 때가 있다. 막상 그림이 완성돼 인물을 떠나보내게 되면 말할 수 없는 허전함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효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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