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바운드 "씁쓸한 현실에 살짝 부은 낭만 한 스푼"
한 때 다이아몬드 에이스, 하이큐 등 고교 스포츠를 다룬 작품에 빠졌던 적이 있다. 그 나이대 특유의 풋풋함과 열정, 스포츠 특유의 카타르시스가 좋았다. 노력하는 주인공과 그가 속한 팀이 기어코 이뤄낸 성취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고졸 선수가 프로 구단에 지명받는 게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안다. TV 속의 억대 연봉 스포츠 스타들은 한 줌 뿐이다. 운 좋게 프로 구단에 지명받은 뒤에도 평생 1군에 올라오지 못한 채 그림자 속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부상 투혼 끝에 우승을 거머쥐어도 고작 고교 리그일 뿐. 이후 선수 생활 수명이나 갉아먹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현실은 냉혹하다.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의 주인공, 헌신짝처럼 내던져진 안경 에이스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몰입 대신 냉소로 그들의 청춘 드라마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스포츠물을 보던 것을 그만뒀다. 좋아하던 작품에 애정은 남아 있지만 그 뿐, 별 다른 감흥은 없었다.
넥슨이 투자했다는 영화 '리바운드'에 흥미를 가진 것도 실화 기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가끔은 현실이 창작물보다 드라마틱 할 때가 있지"라는 짤막한 상념을 품고 영화관에 입장했다.
프로 2군 농구선수 출신의 공익근무요원 강양현은 해체 위기에 놓인 부산 중앙고 농구부 신임 코치로 발탁된다. 우여곡절 끝에 촉망받는 유망주 한준영을 포함한 농구부를 꾸리는 데 성공했지만, 첫 경기 상대로 고교 농구 최강자 '농구 명문' 용산고를 만난다.
설상가상으로 에이스였던 한준영은 용산고로 전입하게 되고, 팀워크가 무너진 중앙고는 용산고를 상대로 몰수패라는 치욕적인 성적표를 받는다. 농구부 해체 위기 앞에서 강양현은 MVP까지 올랐던 고교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선수들을 모은다.
주목받던 천재 선수였지만 슬럼프에 빠진 가드 천기범, 부상으로 꿈을 접고 비뚤어진 스몰 포워드 배규혁, 점프력만 좋은 축구선수 출신 센터 홍순규, 길거리 농구만 해온 파워 포워드 정강호, 만년 벤치 식스맨 허재윤, 열정으로 가득한 자칭 마이클 조던 정진욱.
'리바운드'는 선수 경력도 코치 실력도 어설픈 신임 코치 강양현과 달랑 6명 뿐인 오합지졸 중앙고 농구부가 2012년 전국 고교농구 대회에서 8일간 써 내려간 기적 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물론 영화적 과장이나 다소의 각색은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 기반 영화가 으레 그렇듯 리바운드는 대체로 솔직하고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며 중앙고 농구부 이야기를 그린다.
교장의 "청춘, 열정, 노력 그런 거 나는 믿지 않는다"라는 대사가 상징하는 현실은 유머러스하게 그려지는 언더독의 반란 속에서도 서늘한 그늘을 드리운다. 그렇다. 열정과 노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농구 생활을 늦깎이로 시작한 홍순규와 정강호가 졸업 이후의 미래를 그리지 않는 것, 가망 없는 발목 부상을 감추고 아마 인생 마지막일 농구에 전력을 다하는 배규혁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은 장밋빛 환상에 젖어 있던 관객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정진욱이 부상으로 이탈한 뒤 중앙고 농구부는 교체 없이 전 경기 풀 타임을 소화해야 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이미 경기 결과를 알고 영화관에 입장한 관객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악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 그들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농구 명문 용산고가 전국 대회에서 또 한 차례 우승했다는 당연한 서술 속에 가려진 중앙고 농구부의 분투는 지켜보는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너희들의 농구는 여기서 끝일지 모르겠지만,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라는 강 코치의 말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설령 골인에 실패해도 끝이 아니다. 실패 속에서 얻어 낸 '리바운드'처럼 포기하지 않으면 무언가 잡아챌 수 있다.
장항준 감독은 "슬램덩크가 모두가 사랑하는 작품이라면, 우리 영화는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고 리바운드를 소개했다. 영화를 관람한 이후에는 저 소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뒤처져도, 실패해도 괜찮다. 인생은 길고, 우리에겐 리바운드가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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