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설 역사의 영원한 오점, 평당 1만1천원 ‘시민아파트’

한겨레 2023. 4. 6. 16: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서울&]][서울&]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④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1970년 4월8일은 우리 건축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된 날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직 잠자리에 있을 새벽 6시30분, 마포 와우산 인근에 건립됐던 아파트 한 동이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듯 통째로 붕괴했다. 이로써 33명이 사망하고 40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했다. 우리는 이것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라 부른다. 대한민국 아파트 건설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새벽 아파트 붕괴로 33명 사망자 발생
‘무허가주택 이주대책’을 위한 아파트
낮은 건설비에 하청·뇌물까지 더해져
평당 건축비가 1만1천원밖에 안 돼

육사 출신 김현옥 시장 전시행정 탓 커
‘71년까지 2천 동 건립’ 계획 사라지고
‘철거비=건립비’라는 웃픈 상황 벌어져
공원 된 사고현장은 ‘역사 오점’ 전해줘

1966년 취임해 소위 ‘불도저 시장’이란 별명이 붙은 김현옥(1926~1997) 서울시장의 작품이다. 1926년 경남 진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벨보이(사환)로 중학교를 경험하는 등 가난한 유년을 보냈다. 이후 그는 일제 말 일본군에 지원했고, 해방 뒤 육사를 단기 코스로 졸업한 독특한 인물이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 당시 대령으로서 부산 제3항만 사령관이었던 그는 부산을 군사적으로 장악하는 역할을 했다. 이듬해 준장으로 예편하고 36살에 부산시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4년 뒤 1966년 서울시장에 취임했는데, 이해는 이호철(1932~2016)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동아일보에 연재된 시기로 이미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을 때다. 따라서 도로와 상하수도 등 도시 기반시설도 부족했지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늘어나는 인구가 머물 주택의 부족이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그때까지 정부는 ‘정착지 정책’을 사용해 주거 문제를 풀어나갔다. 정부는 수해나 대규모 화재 때 이재민 구호와 수용 대책으로 특정 지역에 정착시켰다. 당시는 무허가건물이 집단으로 공용부지를 점령하기도 했다.

‘정착지 정책’이란 도심 외곽의 국·공유지를 새로운 정착지로 정한 뒤 가구당 8평씩 땅을 분양해 집단이주 시키는 방식이다. ‘정착지 정책’이 처음 시도된 곳은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일제강점기 공동묘지로 사용했던 미아리 일대(현 성북구 길음2동) 120만 평이었다. 이러한 정착지 이주방식은 그 뒤 사대문 바깥에 20여 개 지구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정착지 정책’이 이주민의 생활 안착이나 그 일대의 도시개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주변에 더 많은 판잣집이 형성되는 등 그야말로 ‘무허가주택 난립지대’를 만들어냈다.

공원으로 변한 와우아파트 터.

김현옥 시장이 취임 뒤 이를 전수 조사해보니 당시 서울시 전체 무허가건물은 13만6650동이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주택정책은 서울시 도시개발에 최우선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김현옥 시장은 이 무허가건물 중 5만 동가량은 개량해 양성화해주고, 나머지 9만 동은 시민아파트를 지어 입주시키거나 광주대단지(현 경기도 성남)로 이주시킨다는 구상을 했다. 이렇게 해서 1960년대 말 서울의 주택시장을 휩쓸었던 ‘시민아파트’가 탄생한 것이다.

시민아파트 건설 계획은 1968년 12월3일 발표됐는데, 1969년부터 1971년까지 240억원의 예산을 들여 무려 2천 동의 시민아파트를 건립한다는 대계획이었다.

와우아파트가 위치했던 곳이라는 동판.

제1호 시민아파트는 1969년 4월21일 준공된 독립문 근처의 영천시장 서쪽 산자락에 있는 19개 동의 금화시민아파트이다. 자신의 주택정책이 실현되는 모습을 직접 본 김현옥 시장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산 중턱에 지어진 아파트를 같이 바라보던 비서관들이 “아파트를 너무 높은데 지으면 위험하기도 하고 주민이 오르내리는 데도 불편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했다. 그러자 김 시장은 이에 대해 “야~ 이 ××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김현옥 시장을 포함한 군 출신의 5·16 쿠데타 세력은 자기 부하들에게 이렇게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 시장의 답변은 시민아파트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해 보이고자 하는 전시행정의 전형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호 시민아파트였던 금화시민아파트 자리.

문제는 그 피해를 일반시민이 고스란히 떠안는다는 사실이다. 서울시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아파트 터에 대한 측량도 없이 시공했으며 지질검사 같은 것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시민아파트가 높은 산자락에 지어졌는데, 지하가 화강암이어서 튼튼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공사가 진행됐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시는 골조공사만 하고 내부공사는 입주자 공동책임으로 했기에 옥상과 계단 난간 설치도 입주자 공동부담이었다. 입주자들은 자기 집 내부공사는 열심히 했지만 공동부담 부분은 등한시해 아이들의 추락사고가 빈발했다.

수색동에 남아 있는 시민아파트.

또 같은 시기 지어진 동부이촌동이나 화곡동 아파트의 경우 공사비가 평당 최저 4만원, 고급아파트일 경우 8만~10만원가량이었지만 시민아파트 특히 와우아파트의 경우 평당 1만8천원에 불과했다. 여기에 하청 커미션과 준공을 받기 위한 뇌물 등을 제하면 평당 건축비는 1만1742원이었다고 한다. 또 마지막 하청업자는 이 비용에서 자신의 이윤을 창출해야 했으니 당연히 부실공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완공된 와우아파트는 1969년 12월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직접 준공테이프를 끊었지만 겨울철이라 바로 입주하지 않고 그 이듬해 5월12일부터 입주했고 무너진 15동은 사고 당일까지 총 30가구 중 15가구 70명만 입주한 상태였지만, 사고시간이 모두 가정에 머물 시간이라 엄청난 희생을 가져왔다.

철거된 옥인아파트 옛사진.

이 사고로 당시 짓고 있던 시민아파트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건설이 중단됐고, 1970년 말 현재 서울 시내에는 총 432개 동의 시민아파트가 남았다. 또 1971년 이후부터 아파트를 보강하기보다 철거하는 쪽으로 정책이 전환돼 계속적으로 철거가 진행됐는데, 그 철거비가 건설비와 맞먹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시민아파트는 은평구 수색동과 중구 회현동에 각각 한 개 동이 있으며, 종로구 옥인동에는 수송동계곡을 복원할 때 지난날 그곳에 시민아파트가 있었다는 흔적을 한쪽 구석에 남겨두었다.

아파트가 붕괴한 그곳은 현재 사고현장이었음을 알리는 동판이 설치됐고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하지만 아직 남산 기슭과 수색 등에 극히 일부의 시민아파트가 남아 대한민국 건축 역사의 오점을 간직한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회현동에 남아 있는 시민아파트.

참고로 와우아파트가 위치한 마포구 창전동의 와우산은 글자 그대로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의 산’이라는 뜻이다. 풍수지리설 등에 의하면, 그 소는 길마재(무악재의 옛 지명)~굴레방다리(현재 아현역 사거리 근처에 있던 창천에 놓인 다리. 1963년 창천이 복개되며 사라졌다)를 거쳐 현재 위치에 도착했다. 큰 소가 서강을 향해 오다가 길마재를 넘으며 힘들어서 길마를 벗어놓고, 북아현동 굴레방다리를 건너면서는 굴레를 벗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와우산에 와서는 여물통을 마포구 하수동에 있었던 농바위에 내려놓고 드러누운 지세라고 한다. 그런데 그 누운 자세가 머리는 서강시범아파트(1971년 건설) 자리며, 엉덩이가 바로 와우시민아파트 자리였다고 한다. 그곳에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을 올려놓았으니 소가 엉덩이를 흔들면서 참사가 벌어진 것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도 했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