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밀해제된 1992년 외교문서…첫 북·미 고위급 접촉과 한·중 수교 막전막후 담겨
총 2361권, 36만여 쪽 분량 공개
북·미가 첫 고위급 회담을 갖고 한·중수교가 성사되면서 국제 정세 격변이 일어났던 1992년 외교 비사가 공개됐다.
외교부는 생산 후 30년이 경과한 1992년도 문서 등 총 2361권(약 36만여 쪽)을 6일 공개했다. 당시 핵사찰 등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간 기싸움을 엿볼 수 있는 문서들도 포함됐다.
한국전쟁 후 북·미 간 첫 고위급 회담은 1992년 1월22일 뉴욕 유엔주재 미국대표부에서 열렸다. 북측 대표는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이 미측 대표인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참석했다.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회담 두 달 후 방한한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상옥 외무장관에게 “캔터 차관-김용순 접촉 시 북측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안정의 요소로 인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용순 대표가 회담에서 “북·미가 수교하면 주한미군 주둔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와 상통하는 부분이다.
1992년 한·미는 북한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한 상호 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캔터 차관은 그해 4월 김용순 서한에 대한 답신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국제 사찰과 남북한 합의에 따른 상호 사찰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미·북 고위급 정책 협의를 정례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남북 상호사찰 실현을 북·미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셈이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 내 미군기지 사찰을 주장하며 영변 핵시설 외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사찰은 거부했다. 양측은 핵사찰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렸고 이듬해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제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를 둘러싼 중국과 대만의 복잡한 속내도 엿볼 수 있다. 그해 9월3일 후카다 하지메 일본 사회당 의원이 주일본 한국대사관 참사관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공식 석상에서는 한·중 수교에 대해 발언을 자제하고 태연한 척했으나 식사나 주연 석상에서는 한국과 대만과의 단교에 특히 크게 기뻐하고 ‘한국이 대단한 정치적 결단을 해주었다. 이로써 한국에 큰 빚을 지게 됐다’고 실토했다”고 전했다. 중국이 한국과 대만의 단교를 큰 외교적 성과로 받아들였음을 잘 보여준다.
북한의 속내도 복잡했다. 수교 직전 북한을 방문했던 후카다 의원은 “한·중 수교에 대해 북한 노동당 간부들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는 자세가 역력했다”라고 전했다. 1992년 9월18일 주홍콩 한국총영사가 주홍콩 일본영사로부터 들은 내용을 보고한 문서를 보면 “한·중 수교 이후 김정일은 장시간의 내부 연설을 통해 일부 공산주의 국가들이 돈 때문에 공산주의 원칙마저 포기하고 있다는 등 중국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함”이라고 쓰여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를 통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을 주도한 양국 협상 대표가 해당 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점도 확인됐다.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이었던 민충식 전 수석은 1991년 8월 3일 일본에서 열린 국제포럼 발언에서 “당시 교섭 대표 간에도 동 협정은 정부 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인식의 일치가 있었다”며 “당시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무상도 동일한 견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국제법이 이제 바뀌고 있는바,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생각할 단계라고 본다”며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의 책임이 모두 해결된 게 아닐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이같은 인식은 현재 일본 정부가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영화 <모가디슈>로 유명해진 ‘소말리아 남북 공관원 탈출’ 사건의 막전막후도 공개됐다. 소말리아 반정부군이 수도 모가디슈로 진격하면서 강신성 주소말리아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과 교민 등 남한인 7명은 대사관저에 피신해있다가 1991년 1월9일 구조기를 타러 공항으로 나갔지만 교신 오류로 탑승하지 못했다. 강 대사는 그 곳에서 김용수 북한대사 등 북측 인사 14명을 조우해 공동 대피를 제의했다. 이들은 함께 한국 대사관저에서 1박을 보냈다. 다음 날 강 대사는 남한 인원만 태울 수 있는 구조기를 제공하겠다는 이탈리아 측 제안을 거절한 뒤 나머지 20명을 데리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운전대를 잡았던 북한인 한상렬씨가 총에 맞아 숨졌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가 주선한 항공기를 타고 케냐의 몸바사로 탈출에 성공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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