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복순’ 전도연 “연기 이렇게 잘 할 줄 몰랐는데 …이 정도면 천직 아닌가요”[인터뷰]
킬러이자 엄마는 “배우 전도연과 엄마 전도연 간극”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자신을 주연으로 한 100억대 예산 영화를 만들겠다는 변성현 감독의 말에 배우 전도연이 떠올린 생각이다. 관객이나 팬 입장에서는 ‘톱 배우’ 전도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니 놀랄 법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여성 배우, 그것도 중년 여성 배우를 원톱으로 한 블록버스터가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납득할 수 있다. 결국 투자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전도연은 ‘해내야 한다’고 되뇌었다. 그리고 해냈다. 영화는 제73회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돼 호평받았다. 공개 3일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1위에 올랐다. 전도연은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거 봐, 내가 할 수 있다 그랬지.”
<길복순>은 전도연에서 시작된 영화다. 변성현 감독은 지난달 21일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전도연을 주인공으로 무슨 영화를 찍을까 고민하다가 전도연과 대화 속에서 힌트를 얻어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전도연의 필모그래피에 액션 영화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했고, ‘엄마 전도연’과 ‘배우 전도연’의 간극이 크다고 느꼈다고 한다. 전도연과 변 감독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전도연을 만나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변 감독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감독이 ‘배우 전도연’에서 ‘킬러 전도연’을 연상시켰나요.
“감독님이랑 술을 여러 차례 마시면서 친해졌어요. 당시 코로나19 때문에 갈 수 있는 데가 없어서 집에서 사람들과 종종 술을 마시곤 했는데 변 감독님도 그렇게 집에 놀러오셨죠. 그래서 제가 일할 때, 집에 있을 때를 둘 다 보신 거예요. 놀라신 거 같아요. 집에서는 아이한테 쩔쩔매니까요. 어릴 때 꿈은 현모양처였다는 말도 들으셨고요. 일터에서의 저와 집에서의 저, 그 간극 차이가 흥미롭다고 느끼셔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면 어떨까 하셨던 것 같아요.”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이라는 대사에 공감하나요.
“배우 일도 힘든 일이긴 한데 아이 키우는 게 제일 힘들죠. 대사로 짧게 표현되지만 정말 공감 많이 했어요. 심플하지 않잖아요, 아이 키우는 건. 저는 온전히 완성된 인물도 아니고 실수하고 부딪히고 반성하면서 살아가는데 아이는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싶잖아요. 맞는지 틀린지도 모르면서 아이랑 같이 성장하는 거죠. 저는 아이한테 저도 서툴다고 계속 얘기해요. 모르는 건 모른다고, 이해해 달라고도요. 아이의 선택을 믿어주기도 하고요.”
-<길복순> 안에서의 모녀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지금까지 엄마 역할을 몇 번 했는데, <길복순>의 엄마·딸 관계가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는 아이를 잘 키우고 싶고, 아이의 비밀도 모두 알고 싶어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죠. 그런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저는 일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자여서 완벽하려고 애를 쓰고, 후회하기 싫어서 엄청나게 집중하거든요. 그런데 집에서는 그렇지가 못해요. 아이는 제가 완벽하려고 한다고 해서 완벽 안에 들어와주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아이와의 관계에서는 부족한 점, 취약한 점이 많이 드러나죠.”
-일할 때 완벽하게, 자신에게 떳떳하게 하려고 하는데 얼마 전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서 자존감이 높지 않다는 말을 해서 의아했습니다.
“스스로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한 이유는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하기 때문이에요. 잘하고 있는 건지 계속 확인받고 싶어하죠. 사람들에게 ‘나 잘했어?’ ‘예뻤어?’ 이렇게 물어봐요. 자신 있기 때문에 선택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선택했으면 후회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자신이 없기 때문에 완벽함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해요.”
-극 중 중년인 길복순이 젊은 세대에게일감을 좀 양보하라고 말하는 인물들도 있습니다. 배우로서는 그런 생각 하지 않나요.
“뭘 양보해줘요, 대체? 모르겠는데(웃음). 지금 극장가 상황이 안 좋아지긴 했지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다양한 작품들이 생겨났고 젊은 후배들이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많이 하고 있어서 부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딸 재영역의) 시아양한테도 우리는 선후배이기도 하지만 동료고, 라이벌 의식을 갖는 것도 좋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카메라 앞에서는 라이벌이지 누구를 배려하고 양보하고, 이런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을 해서요.”
-여성 배우들의 역할이 도드라지는 영화입니다. 이솜, 이연 등의 배우와 함께하신 소감은요.
“재밌었어요. 여성 배우들과 촬영한 경우가 별로 없거든요. 이번에도 소통이 많다기보단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는 작업이긴 했어요. 그런데 연습실에서 셋이 나오는 장면이 있거든요. 변 감독님이 이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남자들 싸움보다 여자들 싸움이 더 재밌다’고요. 감독님도 다른 남성 감독들처럼 여성 배우들보다는 남성 배우들을 더 편해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더 많이 하시는 편이었는데 그 장면 찍고서는 여성 배우들 나오는 작품 또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셔서 너무 좋았어요. 이연 배우랑 이솜 배우랑 우리가 뭔가를 잘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좋다고 했죠. 그 어떤 칭찬보다도 그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
-한국 영화가 여성 배우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나요. 변화를 실감하나요.
“앞으로 느끼겠죠. 영화에서는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다고 생각해요. OTT를 통해서 작품 수가 많아지면서 여성 배우들 주연 작품이 많아지고는 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정말 제한적이었죠. 변 감독님이 <길복순> 제안했을 때 예산이 100억이라 부담스러웠어요. 전도연이 주연이면 투자가 그만큼 안 될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걸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내색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감독님한테 ‘글을 쓰실 때 저를 놓고 쓰시더라도 부담갖지 않으셔도 된다. 젊은 친구들하고 해도 된다’고 얘기를 하긴 했어요. 근데 감독님이 ‘이건 전도연을 놓고 쓰는 거고 전도연을 주인공으로 하는 거다. 약한 얘기 안 했으면 좋겠다. 글 쓰는 것도 어려운데 김 빠지는 소리 안 했으면 한다’고 했어요. 저는 그런 마음이었죠.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라기 보단 ‘이 작품이 현실적으로 나올 수 있을까’하는 거. 근데 감독님이 잡아줘서 너무 감사하죠. 그래서 <길복순>이 진짜 제작에 들어갔을 때 제 자신이 잘 돼야 한다기 보다는 정말 해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긴 거예요. 보여줘야지, 하는 마음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투자가 정말로 됐기 때문에 내 몸이 부서져도, 죽었다 깨어나도 해내야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잘 찍히고 있다고 믿고 갔고, 결과물이 나왔을 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반응도 좋았잖아요. 그때 ‘거 봐, 내가 할 수 있다 그랬지’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사람들한테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하죠.“
-배우가 천직이라고 느끼나요.
“저도 제가 연기를 이렇게 잘 할 줄 몰랐는데, 이렇게 잘하면 천직이라고 생각할만 하지 않나요?”
-많은 감독들이 저마다 ‘전도연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변 감독은 어떤 전도연을 끌어냈다고 생각하나요.
“극 중 ‘무딘 칼’이라는 말이 나와요. (‘오래된 칼은 날도 무뎌지고,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을 킬러 회사 대표인 최민규가 ‘무딘 칼이 더 아파’라고 반박한다. 변 감독은 제작보고회 때 전도연·설경구에게 대한 마음을 담은 대사라고 말했다.) 저는 이 말이 너무 감사했어요. <길복순>은 무딘 칼에 대한 헌사가 있는 작품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이번 작품을 통해 전도연이 뭔가 보여줬다고 하지만, 저는 변 감독님이 무딘 칼들을 통해 뭔가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설경구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요. 제가 실제로 업고다니진 못하겠지만 감독님을 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에요.”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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