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회에 보리수나무와 범종이 있을까

조현 2023. 4. 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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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의 휴심정]한교총 주최, 초기기독교 인천강화 유적지 순례
기독교 초기 토착화 모습 잘 보존돼
“한국 근대화 교육에 큰 기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교회(대한성공회) 이경례신부가 한교총 신평식 사무총장을 보며, 건축양식을 설명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 언덕 위엔 멀리 봐서는 도무지 교회 같지 않은 교회가 서 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한국에선 성공회가 개신교협의체들에 소속돼, 강화읍교회로도 불린다. 멀리서 보면 한양 도성 내 궁궐 같지만, 가까이 보면 사찰 같기도 하다. 1900년에 축성된 이 교회는 한국전쟁 중에도 소실되지 않고 원형이 보존돼 있어, 아름다운 건축미와 기독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로, 강화도 순례 1번지로 손꼽힌다. 이 교회를 지난 4일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순례단들과 함께 찾았다.

개신교 주요 30여개 교단 모임인 한교총은 올해 부활절을 앞두고 3~4일 기독교근대문화유산 탐방의 일환으로 인천·강화 지역의 개신교 초기 유적지들을 찾았다. 이영훈 대표회장과 공동대표회장 권순웅 목사(예장합동 총회장), 명예회장 이철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총회장), 사무총장 신평식 목사, 허은철 총신대 역사교육과 교수 등이 함께했다.

성공회 강화읍교회 정문은 마치 사찰의 일주문 같다. 사찰의 사천왕만 없을 뿐이지 본건물 밖 외삼문의 형식이 똑같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내삼문이 있는데 그 문안에 영락없는 사찰의 종루와 같은 전각에 범종 같은 대종이 있다. 본건물은 십자가와 천주성전이란 한자글씨만 없으면 절의 대웅보전과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더구나 현관 5개의 기둥엔 한시 주련이 걸려있다. 통상 사찰 전각 기둥에 깨달음의 시를 써놓은 주련과 다름이 없다. 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다), 선인선의율조중제대권형(宣仁宣義聿昭拯濟大權衡·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니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등 그리스도적 진리를 담은 것이 다를 뿐이다. 예배당 안에도 궁궐이나 향교나 다름없이 한자 일색이다. 성찬대 앞엔 창조주를 뜻하는 만유진원(萬有眞原·모든 것의 참뿌리)이란 한자 편액이 걸려있다. 중생지천(重生之泉·거듭나는 생물)이라고 표기된 세례대엔 ‘수기세심(修己洗心·자기를 수양하고 마음을 닦고) 거악작선(去惡作善·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하라)’이라고 쓰여있다. 성경적이면서도 유교의 경구와도 별다른 차이가 없는 글귀다.

강화기독교역사박물관 전시물 가운데 인천,강화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던 존스 선교사와 한국인 전도사들. 한국인 전도자들이 하나같이 유교의 선비 복색을 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교회 마당 한켠엔 불교에서 깨달음의 상징인 보리수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1900년 영국인 성공회 선교사 트롤로프 신부가 인도에서 10년 된 보리수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은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 마당엔 유교의 상징인 회화나무도 있었다. 이 회화나무는 2012년 태풍 볼라벤으로 인해 쓰러졌다. 회화나무는 유교국가였던 조선의 궁궐이나 향교에 심은 나무다. 교회 본관 옆 사제관은 디귿자형 한옥으로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강화읍교회의 이런 외관 때문에 당시 이 앞을 지나는 승려들이 십자가가 달린 이 건물을 향해 합장배례를 하고 지나가곤 했다고 전한다. 강화읍교회 관할사제인 이경래 신부는 “프랑스군이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와 미국인이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로 인해 서양선교사에서 대해서도 거부감이 강해 불교와 유교 등 기존 종교를 존중하며 서로 갈등을 빚지 말고 사회에서 화합하자는 뜻을 교회 건축과 조경에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강화내리교회 역사관에 전시된 강화내리교회의 초기 모습. 마치 사찰의 연등 같은 등을 교회 마당에 내건 모습이 이채롭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성공회의 이런 토착화 전략 때문에 초기에 감리교가 적지 않은 박해를 받은 것과 달리 성공회는 강화도 주민들의 별 거부없이 스며들 수 있었다고 한다. 선교 초기 성공회와 함께 강화도에 선교한 교단은 감리교였다. 조선조말 선교를 시작한 개신교는 같은 지역에서 여러 교단이 출혈 경쟁을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반도를 지역별로 분할해 선교하는 신사협정을 맺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경북, 서울은 미국 북장로교, 호남과 충청도는 미국 남장로교. 충청도는 침례교. 부산은 호주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장로교, 강원도와 경기도는 감리교로 분할했다. 해방 이후 북에서 공산당에 의한 교회 박해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교인들과 교회들이 월남한 후 섞이게 됐지만, 강화도는 성공회와 함께 감리교가 먼저 뿌리를 내렸다. 강화도와 인근 섬지역 선교에 전초 기지가 된 곳이 강화도 교산교회다. 처음 감리교 세례를 받은 이는 제물포에서 주막을 하던 이승환이었다. 이승환이 고향집 교산리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기 위해 세례를 인도할 존스 선교사를 교산리에 초청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마을 유지로 유생이던 김상임은 이승환의 집을 불태우겠다고 겁박했다. 김상임은 역서와 <정감록>을 주로 읽고, 계룡산 신도안 등 십승지지를 찾아다니던 인물이었다.

이승환은 마을유지인 김상임이 두려워할 수 없이 교산리 앞바다 배 위에서 어머니가 세례를 받도록 했다. 그런데 그토록 기독교를 반대하던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를 만난뒤 세례를 받고 전도자가 되어 예배당을 세우고, 강화도 일대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김상임이 그토록 거부하던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존스 목사가 한학으로 성경을 전해줄 수 있을 만큼 의외로 한학과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까지 해박했기 때문이었다. 배제학당의 한문교사를 거쳐, 아펠젤러에 이어 정동교회 담임을 한 탁사 최병헌으로부터 존스 목사가 한학과 한국의 토착 종교와 문화까지 깊이 있게 공부한 덕분이었다.

인천내리교회 역사관에 전시된, 1933년 교회에서 거행된 김기범 목사의 부인 영결 예배에서도 유족 등 크리스찬들이 유교의 상례 복장을 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지난해 3월 강화읍에 세워진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에 가면 강화도의 개신교 역사를 한눈에 일별할 수 있다. 특히 개신교 교회들은 교회를 세울 때마다 학교를 같이 세웠다. 110년 전 시각장애인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한글점자를 제작했던 박두성 선생과 독립지사 이동휘, 조봉암 등이 모두 강화도의 교회에서 청년시절 활동한 크리스천들이었다. 특히 반상뿐 아니라 남녀차별 철폐에 앞장서 강화도에만 6개의 여학교를 세웠다.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이사장 최훈철 목사는 “여학교를 나온 이들이 남녀 차별을 반대하고, 똑똑한 신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마뜩치않게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 ‘강화도 여자는 뻔뻔스럽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둘러본 인천내리교회(감리교)와 내동교회(성공회), 인천제일교회(장로교)에서도 교육, 의료, 구제, 복지, 문화, 독립운동의 첨병 노릇을 한 초기 개신교의 모습이 역력했다. 허은철 교수는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말은 허구”라며 “우리나라에서 근대화 교육은 교회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한교총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는 “중국 종교부로부터 중국의 기독교는 아편전쟁 때 서양 편을 들었는데, 한국 기독교는 자기 나라를 위한 애국 애족 독립운동에 앞장선 모습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고 전했다.

인천 제물포항에 세워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앞에선 한교총 이철 명예회장과 이영훈 대표회장, 권숭웅 회장(사진 왼쪽부터). 조현 종교전문기자

그러나 영화학교를 세워 인천지역 근대교육에 앞장선 인천내리교회 역사관엔 한국인 최초 개신교 목사이자 애국지사였던 김기범 목사가 전형적인 유학자처럼 갓을 쓴 모습의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성공회 내동교회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외형은 중세 유럽의 성 같다. 내동교회에 온 랜디스 선교사는 내과의사이면서도 한글과 한국문화를 열심히 연구하고 한문실력도 뛰어나 가정의례, 동화, 한국의 귀신, 한의학, 동학사상, 속담까지 연구한 자료를 남겨 한국학 연구자료로 높게 평가받고 있을 정도다. 랜디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성누가병원은 인천지역 의료의 중심축을 담당했다. 당시만 해도 조선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서양 기독교권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비 지원도 형편없었다. 허은철 교수는 “성공회는 당시 연간 일본에 350만원, 중국에 300만원을 지원했지만, 한국엔 불과 1700원밖에 지원하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그 많은 일을 하고, 결국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 개신교가 뿌리내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설명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1885년 개신교 선교사 최초로 제물포항에 내리는 장면을 담아 세운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앞에 선 한교총 지도자들은 초기 기독교의 의미를 희망에 두었다. 한교총 회장 권순웅 목사는 “이 땅의 초기 교회가 의료, 교육, 고아구제 등에 앞장 서서 미래세대의 희망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명예회장인 이철 감리교 감독은 “초기 교회들이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만들어냈기에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도 가능했다”고 밝혔다.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는 이단 사이비들이 창궐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우리가 잘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초기 선교사와 교회들이 모여준 선한 영향력이 감퇴하고 물량주의와 교권주의가 팽배해진 결과”라며 “선한 영향력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가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강화/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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