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액주주와 대주주 사이에서…고민되는 자사주 활용법
1분기 상장사 35곳 자사주 소각 결정...EB 발행 기업도 급증
소각 없는 자사주 매입은 반쪽짜리 주주환원
주주환원을 외치는 행동주의 펀드의 힘이 세지면서 자사주를 둘러싼 상장기업들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더 이상 소각을 수반하지 않는 자사주 매입이 환영받지 못하면서다.
올 들어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사주 소각을 결정하는 상장사 수가 부쩍 늘어난 배경이다. 하지만 자사주를 소각하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다. 고금리 환경에서 자사주는 자금조달 옵션 중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사주를 활용해 교환사채(EB)를 발행하거나 아예 매각하는 식으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상장사도 적지 않다.
분명한 건 자사주 활용법을 고민하는 수준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자사주가 주로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쓰였던 과거와는 다르다는 게 시장 분위기다.
○1분기 자사주 소각 '역대 최대'
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1분기에 상장사 35곳이 자사주 소각을 결정했다. 현대자동차와 KB금융지주, 크래프톤, SK, KT 등이 소각 행렬에 참여했다.
사상 최대 규모로 추정된다. 작년 1분기(16곳)와 비교하면 자사주 소각을 결정한 상장사가 두 배 이상 늘었다. 연도별로 1분기 자사주 소각을 결정한 상장사 수를 살펴보면 2019년 7곳, 2020년 23곳, 2021년 8곳, 2022년 16곳 등이다.
올해 자사주 소각으로 시장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은 SK그룹이다. SK㈜와 SK네트웍스가 각각 1000억원과 700억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을 결정한 데 이어 SK스퀘어도 2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연내 소각할 예정이다. SK이노베이션은 향후 자회사인 SK온 상장 이후 주주가치 훼손을 막기 위해 자사주 10%를 매입해 소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한국 상장기업은 자사주를 유독 많이 갖고 있다. 기업이 자사주를 사는 이유는 크게 최대주주의 지배력을 높이는 목적과 전체 주식수를 줄여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나뉜다. 과거에는 소액주주보단 대주주를 위한 목적이 많았다. 대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자주 활용되기도 했다. 자사주 매입 소각이 관행처럼 여겨지는 미국 주식시장과는 정반대다.
대주주들이 자사주 활용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자사주를 제3자에 넘겨 우호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분쟁 기업에선 '백기사'를 끌어들이는 방어 수단이 된다.
무엇보다 ‘자사주 마법’을 이용해 지배력을 높일 수 있었다. 인적분할 및 현물출자 유상증자를 통해 지배구조를 바꾸면서 자사주를 활용해 대주주 지배력을 높일 수 있었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가 인적분할 이후엔 신설 회사의 의결권 주식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어느 때보다 주주환원 요구 목소리가 거세지면서다. 올해 주주총회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일부 상장사를 대상으로 자사주 소각 및 취득 등을 직접 요구하고 관철시키기도 했다.
시장 관계자는 “올해 주총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성패를 떠나서 주주의 권리 행사 필요성과 주주가치 제고라는 목표를 확실하게 시장에 인식시켰다”며 “기업들도 선제적으로 주주환원에 나서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사주 활용한 EB 발행
자사주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상장사도 늘었다. 올해 1분기에 자사주를 활용해 외부 자금조달에 나선 상장사 수도 늘었다. 올해 EB 발행을 결정한 상장사는 총 10곳이다. 이 중 9곳이 자사주를 교환 대상으로 삼은 EB를 발행한다.
작년 같은 기간에는 상장사 5곳이 자사주를 활용한 EB를 발행했던 것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SK하이닉스가 2조2377억원 규모의 EB를 발행하기로 결정하면서 금액 규모에서도 급증할 전망이다.
기업은 대부분 주가가 하락했을 때 자사주를 매입한다. 이후 주가가 회복하거나 자금 사정이 여의찮아졌을 때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다.
EB는 표면이자율이 0%로 발행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만기 이자율도 시장 금리와 비교하면 크게 낮다. 금리보단 향후 주식 전환을 통한 차익 실현이 주된 교환사채 투자요인이라서다.
올해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를 발행하기로 한 상장사 9곳을 살펴보면 표면이자율은 대부분 0~1%, 만기 이자율은 0~3%다. 다른 자금 조달 수단보다 EB를 발행할 때 금융비용을 아낄 수 있는 셈이다.
투자자 입장에선 원금 손실 가능성이 크게 낮은 데다 EB에는 보호예수 기간 없이 즉시 주식으로 전환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력이 크다. 전환사채의 경우 통상 1년의 주식전환 금지 기간이 있는 것과 비교된다.
미래나노텍은 작년 9월과 올해 2월 두 차례에 걸쳐 자사주 연계 EB를 발행해 총 400억원을 조달했다. 미래나노텍은 양극재 첨가제 등을 포스코퓨처엠(옛 포스코케미칼)에 납품하는 기업이다. 최근 포스코퓨처엠이 삼성SDI와 40조원 규모의 전기차용 양극재 공급계약을 체결하면서 대표 수혜주로 평가되며 주가가 급등했다. 올해 초 1만5000원대였던 미래나노텍 주가는 4월 3만4000원대로 상승했다.
주가가 상승하자 EB 투자자들은 반년도 안 돼 사채 대부분을 보통주로 전환했다. 작년 9월 발행된 EB는 올해 3월 전량 행사됐다. 올해 2월 발행된 EB도 두 달도 되지 않아 75%가 보통주로 교환됐다. 각 교환사채의 교환가액은 1만7765원, 1만9934원이다. 미래나노텍 주가가 3만4000원대에 형성된 점을 감안하면 두 배에 가까운 차익을 거둘 수 있다. 전체 발행주식 수의 약 5.5%에 해당하는 자사주가 시장에서 풀린 것이다.
이렇게 주주들을 위해 매입한 자사주가 매물로 쏟아지면서 주주들에게 피해를 미칠 수 있게 된다. '오버행' 이슈가 불거지는 셈이다.
EB 발행이 아니더라도 한샘과 같이 자사주를 직접 처분하는 식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곳들도 있다. 한샘은 대주주인 IMM PE가 회사 지분을 늘리기 위해 실시한 공개매수에 참여하는 식으로 자사주를 처분했다.
시장에선 점점 자사주 매입 자체만 가지고 호재로 여기지 않고 있다. 반쪽짜리 주주환원 정책으로 여긴다. 자사주가 어떻게 활용될지에 따라 주주가치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증시에서 자사주 매입이 소각까지 이어지는 비중은 3%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된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1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자사주 매입을 공시한 기업은 90% 이상이 ‘주가 안정 및 주주가치 제고’를 취득 목적으로 공시했다. 반면 자사주를 처분할 때는 주가 안정 및 주주환원 목적은 4%가 채 되지 않았다. 그 외 임직원 성과 보상, 주식매수선택권 행사, 투자 및 운영자금 확보 등 기업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활용됐다.
중장기적으로 자사주 소각이 관행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한 시장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자사주 매입 기업에 소각을 의무화하기 어렵지만 상식선을 넘어선 과도한 자사주 보유나 자사주 유통에 관련 최소한의 규제가 있어야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최석철 기자 dolso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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