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4시간 그렸어요”...명품악역 박기웅, 붓을 든 이유는 [인터뷰]

신수현 기자(soo1@mk.co.kr) 2023. 4. 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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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진심인 작가이자 배우
‘빌런’ 48명 모아놓은 작품 기획
배우이자 작가인 박기웅이 자신이 직접 그린 작품들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이승환 기자]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 입구인 지하에 들어서면 거대한 기둥에 익숙한 배우의 얼굴과 전시회 ‘48 빌런즈(48 VILLAINS)’를 알리는 문구가 나온다. 2010년 드라마 ‘추노’의 ‘그분’, 2012년 드라마 ‘각시탈’의 ‘기무라 슌지’, 2018년 드라마 ‘리턴’의 ‘강인호’ 등 악역 연기로 맹활약했던 배우 박기웅이다.

박기웅은 ‘서울스카이’에서 특별 작품 전시회 ‘48 빌런즈’를 진행 중이다. 48빌런즈는 영화, 드라마 속 악역을 그린 그림으로, 박기웅이 모든 작품을 직접 그렸다.

박기웅은 악역과 선한 역을 넘나들며 배역, 상황에 맞는 연기를 선보인 연기파 배우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본업인 연기는 물론 그림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2021년 화가(미술작가)로 데뷔해 화가로서의 삶도 살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배우, 가수, 운동선수 등이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는 등 예술 활동을 하는 유명인들이 많아졌지만, 박기웅은 이들과는 색깔이 조금 다르다. 정식으로 미술을 공부한 미술학도였다.

그는 고등학생 때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화가를 꿈꿨다. 하지만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상심하던 중 눈에 띄는 외모 덕분에 2003년 서울 신촌 길거리에서 캐스팅됐고, 2005년 영화 ‘괴담’으로 데뷔하며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박기웅은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어렸을 때부터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생긴 얼굴로 유명했다. 소위 ‘얼짱(얼굴 짱)’으로 불렸다. 갈망하던 대학교는 아니었지만,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배우이자 작가인 박기웅을 직접 만나 전시회 48빌런즈 기획 배경과 소개, 근황, 앞으로의 계획 등에 관해 들어봤다.

- 왜 48명을 그렸는지.

▶ 독일 미술계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위인 48명을 그린 작품 ‘48포트레이츠(48portraits)’에서 영감을 받았다. 여러 번 악역 연기를 하면서 악역 배우로 조명받았고 악역 배우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게 됐다. 악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마치 헌사하듯이 악역들을 위한 작품을 전시해보고 싶어서 영화 속 악역 46명, 드라마 속 악역 2명을 그림으로 그린 48 빌런즈를 기획했다.

최근에는 대중에게 사랑받고 박수를 받는 악역 배우들도 있지만, 악역 배우들도 영웅 역할을 하는 배우들과 같이 고생해도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박수를 덜 받고 주목받지 못했다. 이런 현실이 안타까웠다.

예를 들어 영화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의 비열한 약혼자(칼 헉클리) 역을 맡았던 배우 빌리 제인,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의 숙적이자 악역 스미스 요원 역을 연기한 배우 휴고 위빙도 혼신을 다해 연기했지만, 공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잭 도슨 역), 키아누 리브스(네오 역)에게만 돌아가는 게 아쉬웠다.

- 48명의 악역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은.

▶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배우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했던 배역(트래비스 버클)을 그렸을 때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심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작품을 그릴 때 붓질도 흔들렸고, 완벽한 형태도 구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이번 전시회에서 뺄까 고민했지만, 그림 그리는 과정도 큰 의미에서 하나의 작품이라고 판단해서 남겼다.

- 최근 흥행한 한국 드라마 ‘더 글로리’의 악역(박연진)은 왜 이번 작품에 없나.

▶ ‘더 글로리’가 흥행한 것은 알고 있다. 배우 임지연 씨가 ‘더 글로리’ 악역(박연진)을 매우 잘 연기했다고 들었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할 때 연기도 병행했기에 시간이 부족해서 아직 드라마 ‘더 글로리’를 못 봤다.

- 총 작업 기간은.

▶ 총 작업 기간만 1년 반 조금 넘는다. 각 작품마다 작업 시간은 다른데, 하루 만에 완성한 작품도 있다.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린 그림은 2주 넘게 걸린 것 같다. 끼니도 거른 채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씩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밤이 새는지 모르고 그린 적도 있고, 하루 14시간 동안 그림을 그린 적도 있다. 주로 밤에 그림을 그렸다.

연기와 그림 그리는 작업을 병행하다보니 시간 제약을 받았다. 유화그림은 어떤 물감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물감 마르는 속도가 다르다. 물감을 덧바르는 횟수에 따라 질감, 색상이 다르기 때문에 고민해야 할 게 많다. 물감이 어느 정도 말랐을 때 그 위에 다시 물감을 덧바를지 말지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틀 연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에만 작업했다.

배우이자 작가인 박기웅이 자신이 그린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승환 기자>
- 물감을 흰색과 검은색만 사용해서 그렸던데.

▶ 이번 전시회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배우의 감정이었다. 인물을 그릴 때 여러 색깔을 사용하면 인물의 표정을 표현하는 게 쉽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에만 집중하고 싶었고, 진중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화려한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흰색과 검은색만 사용한 이유다. 주변 작가들이 나에게 용기가 대단하다고 말하더라. 흰색, 검은색만 사용하면 붓 터치는 물론 그림 실력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 왜 작품에 캡션이 없나.

▶ 미술관에 가면 그림 옆 혹은 아래에 작품 제목, 작품 제작연도, 작품 장르 등 작품 정보를 적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캡션이라고 부른다. 각 그림 옆에 캡션을 넣으려다가 2가지 이유로 넣지 않았다.

우선 48명의 작품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캡션을 뺐다. 그래서 캡션을 한쪽으로 몰아 놨다. 두 번째는 관람객들에게 그림을 보면서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떤 역할을 했던 배우인지 찾아보는 재미도 드리고 싶어서 캡션을 뺐다.

- 배우, 가수, 운동선수 등 유명인들 중에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미술의 저변이 넓어졌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반면 유명인들이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너무 쉽게 작품을 판매하고 전문 작가들의 밥그릇을 빼앗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 그림을 그리는 등 예술 활동을 하는 연예인, 일명 ‘아트테이너’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미술 시장을 키우는 데 연예인들의 장점을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트테이너들이 밥그릇 빼앗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아트테이너 덕분에 전체 미술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은 예술 융복합 시대인 것 같다. 상업 예술과 순수 예술을 어떻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을까.

- 또 작품 전시회 기획 중인지.

▶ 계속 구상 중이지만 지금 당장 특별한 계획은 없다. 소외된 사람이나 소외된 것들,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는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 올해 연기 계획은.

▶ 드라마 ‘판도라 조작된 낙원’이 한창 방영 중이다. 촬영은 다 끝났다. 찍어놓은 작품도 있는데 언제 공개될지 모르겠다. 올해 드라마나 영화 등 작품 1개를 더 해보고 싶다.

- 연기와 그림 그리는 것 중 뭐가 더 힘든지.

▶ 둘 다 힘들다. 특히 연기는 하면 할수록 힘들다.

- 맡는 배역을 보면 대사도 많던데 대본 암기 비법은.

▶ 대사에 전문적인 용어가 있을 때는 정확하게 외운다. 나머지 대사는 몸을 사용하면서 외운다. 손짓 발짓은 물론 몸을 사용하면서 상황을 익히고, 상황에 맞는 대사까지 자연스럽게 온몸을 사용해 외운다.

- 뛰어난 악역 연기를 많이 보여줬다. 또 도전해보고 싶은 연기는.

▶ 어린 시절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자랐다. 사투리가 심하지는 않지만 사투리를 쓰는 배역을 연기해보고 싶다.

- 인상 깊게 본 영화, 드라마는.

▶ 정말 많아서 꼽는 게 힘들다. 예술성이 뛰어난 영화, 마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도 좋아한다. 그래도 꼭 뽑아야 한다면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영화 ‘타이타닉’, ‘글래디에이터’, ‘아바타’가 기억에 남는다. 많은 분들한테 공감을 받은 영화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 연기를 본받고 싶은 배우는.

▶ 정말 많다. 이번 전시회 ‘48빌런즈’는 외국인 배우 중심으로 구성됐다. 넣고 싶은 한국인 배우가 정말 많아서 고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 배우 중에서는 최민식 선배님, 이병헌 선배님 등 2명만 그렸다.

외국 배우 중에서는 영화 ‘대부’의 주인공인 알 파치노, 한국인 배우 중에서는 이병헌 선배님의 연기를 특히 좋아한다. 이병헌 선배님은 연기 범주가 정말 넓다. 어떤 배역도 완벽하게 소화할 만큼 연기력도 뛰어나다. 내가 이병헌 선배님의 나이가 됐을 때 그 정도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 어떤 배우,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 ‘예전에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중간 이상 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너무 어렵다. 2021년 작가로 데뷔해 지금까지 작가 활동도 해오고 있는데, 작가 박기웅의 다음 행보를 궁금해 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

신수현 기자

* 매일경제 유튜브 ‘매경5F’에서 박기웅님의 인터뷰와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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