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주한미군도 핵사찰 받아야"…92년 북미 첫 고위급 접촉 막전막후
북한이 1992년 평안북도 영변 핵시설 사찰을 수용할 테니 주한미군기지도 사찰을 받으라고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옛소련 붕괴와 한중수교 등으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안전장치로 미국과 수교를 위해 첫 고위급 접촉에 나서며 외교전에 주력할 때다.
하지만 '핵사찰'을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북한은 이듬해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는 초강수로 맞선다. 이후 30여 년간 한반도는 핵위기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외교부가 6일 비밀해제한 36만 쪽에 달하는 외교문서에 담겼다.
이에 따르면, 북한은 1991년 12월 방북한 스티븐 솔라즈 미 민주당 하원의원에게 우리 정부가 제안한 남북 동시 사찰을 거부했다. 대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영변 핵시설 사찰과 자신들의 남한 내 미군기지 사찰을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주한미군은 1950년대 배치했던 전술핵무기들을 1970년대부터 축소했다가 1991년 완전히 철수했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했다. 하지만 북한은 주한미군기지에 핵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하며 핵사찰을 요구한 것이다.
1992년 1월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과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만난다. 북미 간 열린 첫 고위급 회담이다. 회담에서 오간 양측의 구체적 발언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전후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문서들이 이번에 여럿 공개됐다.
같은 해 3월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방한해 이상옥 외무장관을 만났다. 그는 "(북한은 미국이 참여하는) '3자 사찰'도 수락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며 "핵사찰이 한국 내 미군기지에 중점을 두고 실시될 경우, 미국이 대북한 사찰에 참여치 못하게 되면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미 행정부에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제안에 미국이 남북 상호 핵사찰 틀에서 미국도 참여하겠다고 제의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솔로몬 차관보는 또 "캔터-김용순 접촉에서 북측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안정의 요소(source of stability)로 인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주한미군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장관은 미측의 설명에 "3자 사찰 참여 문제는 계속 협의가 필요할 것"이라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북한은 1992년 IAEA의 임시사찰을 수용했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명시된 '남북한 상호사찰' 요구에는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북한은 남한 내 미군기지 사찰을 우선 주장하며 영변 핵시설 외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사찰을 거부했다. IAEA 임시사찰에 응했으니, 남한 내 미군기지에 대한 북한의 사찰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영남 당시 북한 외무상은 유엔총회 연설차 뉴욕을 방문하면서 "IAEA 사찰을 통해 우리 핵 의혹은 해소되고 있는 반면, 상호 사찰이 실시되지 않아 남한 내 미군기지에 대한 핵 의혹이 상존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미는 IAEA 사찰만으로는 북한의 핵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1992년 4월 북한은 IAEA 핵안전조치협정을 비준하고 그다음 달 이에 따른 최초 보고서를 제출했다. 해당 보고서에는 북한이 영변에 건설 중이던 방사능화학실험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당시 수기로 남겨진 메모에 따르면, 안기부는 '상기 방사능 화학연구소가 핵재처리시설을 말하는 것'이라고 비공식 평가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핵사찰에 더 이상 진척이 없자 한미는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재개를 발표했고, 북한은 거세게 반발했다. 남북미는 갈등 속에서도 물밑 접촉을 계속하며 대화창구는 열어뒀지만, 북한은 NPT 탈퇴로 찬물을 끼얹었다. 그렇게 '1차 북핵위기'가 시작돼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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