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딛고 바이올리니스트로…공민배 “음악은 제 전부예요”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5세 때 자폐 스펙트럼 판정
피아노 치다 시작한 바이올린
음악 연주하며 많은 점 달라져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도 순식간에 음악으로 몰입한다. 오선지에 그려진 기호들과 맺은 소중한 약속을 지키듯, 신중하게 정성 들여 활을 긋는다. 누구와 있든 어디에 있든,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는 오로지 자신과 바이올린, 둘만 존재했다. “매일 4~5시간씩 연습했다”는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은 발달 장애를 가진 ‘소년 바이올리니스트’ 공민배 군이 서울시향과의 다가올 연주회에서 선보일 곡이다. 차기 음악감독인 얍 판 츠베덴은 공 군의 연주를 주의 깊게 들으며 왼손으로 박자를 맞췄다.
“멘델스존 협주곡은 우아하고 감미로운 느낌이 있습니다. 바이올린을 켤 때는 좋은 생각이 들어요.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지난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내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습실에서 기자들과 만난 공민배(19. 화성나래학교) 군은 연주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은 열한 살 때였다. 다섯 살에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은 공 군의 삶은 음악을 만난 뒤 많은 점이 달라졌다. 이날 자리에 함께 한 공 군의 어머니 임미숙 씨는 “민배의 어린시절은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다”고 돌아봤다. 보통 사람들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조차 견디지 못하는 소음을 감지해 귀를 막고 다녔다”. “음식을 씹는 것이 불편해 먹지도 못했고, 먹는 것이 없으니 화장실도 한 달에 두 번 밖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과의 만남은 우연히, ‘운명처럼’ 찾아왔다. ‘일하는 엄마’인 임 씨는 “초등학교 입학 이후 하루종일 아이를 맡길 곳”을 찾던 중 피아노 학원에 보내게 됐다. 공 군은 “초등학교 때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다가 바이올린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바이올린을 하는 것이 더 재밌고 즐거웠습니다.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공민배)
학교를 마친 뒤 2시 30분에 도착한 학원에서의 레슨 시간은 고작 10~20분에 불과했다. 그 뒤 엄마가 데리러 오는 7시까지 작은 연습공간에 틀어박혀 바이올린과 씨름했다. “싫다고도,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학원에서 가르쳐준 대로 했던 거예요. 그러다 6학년 때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임미숙)
공 군과 서울시향의 인연은 악단의 사회공헌사업인 ‘행복한 음악회, 함께!’에서 시작됐다. 이 음악회는 신체의 장애를 극복하고 전문 연주자가 되기 위한 꿈을 꾸는 미래의 연주자들의 성장을 돕는 프로젝트다. 공 군은 지난해 오디션에 합격, 서울시향과 세 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오는 7일엔 차기 음악감독인 얍 판 츠베덴이 무보수로 지휘하는 서울시향과의 연주회(이화여대 대강당)에 함께 한다. 지금은 공연을 앞두고 본격적인 리허설에 한창이다. 이날도 공 군과 서울시향은 1시간 가량 리허설을 진행했다. “숨 쉬고, 쉼호흡하고, 속으로 노래 부르며”(공민배) 리허설을 진행했다고 한다. 츠베덴 감독은 “민배와 함께 한 리허설은 매우 좋았다”고 말했다.
“리허설에서 민배를 배려해 연주의 템포를 조금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도리어 빨리 해달라며 자신의 템포에 맞춰달라고 요구하더라고요. (웃음)(공 군은) 아주 특별하고 좋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훌륭한 한 사람이에요. 음악적으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얍 판 츠베덴)
공 군에게도 츠베덴 감독은 특별하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생방송 출연을 앞둔 빠듯한 일정에도 츠베덴 감독이 이 자리를 깜짝 방문하자, 공 군의 시선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공 군은 “츠베덴 감독님은 그냥 다 좋다. 함께 하면서 재밌고 즐겁다”며 웃었다.
‘아주 특별한 콘서트’라는 제목이 붙은 이 음악회는 츠베덴 감독과 서울시향이 각자 힘써온 사회 활동의 뜻이 맞아 성사됐다. 공연은 츠베덴 감독이 서울시향에 제안하며 올리게 됐다. 츠베덴 감독은 1997년 모국 네덜란드에서 자폐 아동을 돕는 ‘파파게노 재단’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그의 셋째 아들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다. 파파게노 재단에선 음악 치료를 통해 자폐를 가진 사람들의 사회 진출을 돕고 있다. 대한민국 축구 4강 신화를 일군 히딩크 감독도 이 재단의 이사로 활동 중이다.
츠베덴 감독은 “우리 사회엔 특별한 니즈를 가진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그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다시 돌려준다”고 말했다. ‘행복한 음악회’를 통해 공 군을 지도해온 서울시향 최해성 단원(바이올린)도 츠베덴 감독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그는 “모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힘듦과 슬럼프를 겪는데, 음악을 하며 계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민배를 보며 배우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했다.
음악과 함께 하는 공 군의 매일은 꿈꾸는 삶이다. 혼자 연습을 할 때엔 시간 가는 줄도 몰라, 식사를 거르기 일쑤다. 음악을 하며 ‘힘든 순간’은 없냐는 질문에도 “힘들지 않다. 진짜 없다”고 힘줘 말한다. 한 분야에 파고드는 자폐 스펙트럼의 특성이 공 군의 음악적 역량으로 발현됐다. 서울시향의 연주회는 빼놓지 않고 다닐 만큼 열혈팬이다.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혼자 지하철로 오간다.
어머니 임미숙 씨는 “자폐 자녀를 둔 아이들에게도 꼭 악기를 추천하고 싶다”며 “음악을 시작하며 모든 것이 좋아졌다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민배는 제로에서 시작해 8점까지 성장할 정도로 좋아졌고, 참을성을 늘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음악이 아이를 살렸다”고 말했다. 바이올린과 함께 하는 공 군은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어려워하지 않고, 눈을 맞추고 인사하며 악수를 청한다. 이날도 취재진과 스태프 한 명 한 명에게 “반갑습니다. 공민배입니다”라며 먼저 다가왔다. 야무지게 명함까지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츠베덴 감독은 “자폐를 가진 친구들은 무척 순수하다. 이들 중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무척 많다”며 “눈을 마주치는 것은 힘들어 하지만, 마음의 교류를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음악이 이 친구들을 치료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음악가도 많고, 닮고 싶은 음악가도 많다. 현실의 어려움도 있지만, 공 군은 바이올리니스트로의 꿈을 키우고 있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무수히 많은 생각과 단어 중 가장 좋은 말을 골라 음악을 향한 진심과 의지를 전한다.
“멋진 연주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연주, 진정한 마음으로 연주입니다. 더 열심히 연습해서, 더 많은 무대에서 연주하고 싶습니다. 더 많은 곡을 배우고, 해석도 배우겠습니다. 제겐 음악이 전부입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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