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단교-중국 수교’에 속으로 웃은 中…표정 관리한 北 ‘충격’[외교문서 공개]

2023. 4. 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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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국교수립부터 노태우 대통령 방중까지…북방정책 ‘완성’
1990년 5월 제1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한 연형묵 총리를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자료사진] [연합]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한중 국교수립 후 불과 한 달 만에 성사된 노태우 대통령의 중국방문은 ‘북방정책’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것”

독일 일간지 쉬드도이체 차이퉁(Sueddeutsche Zeitung)은 1992년 9월29일자 ‘두번째의 커다란 전환점’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첫 번째 전환점은 1990년 말 노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이며, 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두 번째 전환점이라는 것이다.

냉전 종식으로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초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면서 전세계가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외교부는 중국과의 국교수립과 노태우 대통령의 중국 방문 등 30년이 경과한 1992년도 외교문서 2361권(약 36만쪽 분량)을 원문해제 요약본과 함께 16일 일반에 공개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92년 8월24일자 공동성명을 통해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을 결정했다. 우리나라 이상옥 외무부 장관이 베이징을 방문해 첸지천 중국외교부장이 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공식 수립됐다.

양국은 “유엔헌장의 원칙들과 주권 및 영토보전의 상호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불간섭, 평등과 호혜, 그리고 평화공존의 원칙에 입각해 항구적인 선린우호협력 간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에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며,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중국과의 수교 이틀 전인 1992년 8월22일 대만은 한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한국 정부는 ‘중국이 남북한과 수교하면 우리도 대만과 동시에 외교관계를 가질 수 없는가’에 대해 “남북한은 상대방과 제3국과의 동시수교를 상호 수용해왔고, 유엔에도 동시 가입하고 있는 반면, 중국과 대만은 양측이 제3국과의 동시수교를 수용하지 않고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독립된 국가로서 동시에 인정되지 않고 있어 우리가 중국, 대만과 동시에 외교관계를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봤다.

전통 우방국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는 지적에 대해 외무부(외교부의 전신)는 “국가 간의 관계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자국의 안보적, 경제적 이해 관계상 불가능하다면 통절히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라며 “미국, 일본과 모든 서방국을 포함한 세계 대다수 국가들이 대만과 단교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대만과 단교하게 된 것은 부득이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정치적 결단” 대만 단교에 속으로 웃은 中…표정 관리한 北

중국은 공식 석상에서는 표정관리를 했지만, 한국과 대만의 단교에 “한국이 대단한 정치적 결단을 해주었다. 이로써 한국에 큰 빚을 지게 됐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1992년 9월3일 후카다 하지메 일본 사회당 의원이 주일본 한국대사관 참사관을 만나 “공산당 간부들이 공식 석상에서는 한중 수교에 대해 발언을 자제하고 태연한 척했으나 식사나 주연 석상에서는 한국과 대만과의 단교에 크게 특히 기뻐했다”고 전했다.

대만은 한중 수교 가능성을 감지하고 불안함을 나타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등휘 대만총통은 1992년 1월 김종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아시아에 남아있는 공산주의 세 나라(중국, 북한, 베트남)는 시간문제이지 저절로 넘어질 것이 확실하다”며 “대륙(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속도를 늦춰 신중히 추진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한중 수교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분위기도 읽힌다. 면담에 배석한 첸푸 대만 외교부장은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북방정책을 충분히 이해하나 만약 대륙과 수교한다고 하더라도 양국 관계가 현재대로 유지되길 희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의 충격은 상당했다. 후카다 의원은 방중 전인 1992년 8월22일 방북해 김용순 당시 노동당 국제부장과 회담했는데 후카다 의원은 “한중 수교에 대해 북한 노동당 간부들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는 자세가 역력했다”고 전했다. 김 부장은 당시 후카다 의원에게 1992년 4월 양상쿤 국가주석의 방북 때 ‘연내 한중수교 원칙’에 대한 시사가 있었고, 수교 일자 통보는 약 1주일 전에 있었다고 밝혔다.

1992년 9월18일 주 홍콩 한국 총영사가 주 홍콩 일본영사로부터 들은 내용에 따르면 “한중 수교 이후 김정일은 장시간의 내부 연설을 통해 일부 공산주의 국가들이 돈 때문에 공산주의 원칙마저 포기하고 있다는 등 중국을 맹렬히 비난했다고 한다”고 보고했다.

한-베트남 수교까지 광폭 ‘북방정책’에 美 “속도 조절하라”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 정책의 마지막 주요과제가 마무리됐다. 노 대통령은 1992년 9월27일부터 30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중국을 공식 방문해 양상쿤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노 대통령은 1992년 10월 양 주석에게 감사의 서한을 보냈다. 노 대통령은 “성공적인 회담으로 오랫동안 단절됐던 한중 양국 간 우호협력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나아가 양국의 공동 번영과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두 나라가 기여할 수 있게 된 데 대해 보람을 느끼고 있다”며 양 주석의 방한을 초청했다.

같은 해 12월5일 박동진 주미대사가 리처드 소로몬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면담한 자리에서 미국측은 “베트남과의 관계 개선은 당분간이라도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한국 정부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내전 종식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어 미-베트남 관계 정상화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측은 캄보디아 사태가 해결됐기 때문에 베트남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겠다는 우리측 입장에 ‘캄보디아 평화 협정의 성실한 이행 등 관계 개선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협조해 달라’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silverpap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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