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진보 커뮤니티는 왜 보수가 됐나
● “‘동네 야구 4번 타자’ 文”
● 보수정당이 얻게 된 군사력
● ‘여옥대첩’과 일베의 탄생
● ‘조국 사태’ 후 엠팍의 변화
● 정치 공동체 아닌 저잣거리
제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12월,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가 온라인 커뮤니티인 MLB파크(엠팍)에 '인증샷'을 남겼다. 그가 올린 글에는 짧은 인사와 함께 컴퓨터에 MLB파크 화면을 띄워놓은 사진이 첨부됐다. 일종의 '커뮤니티 선거운동'이었다.
엠팍 이용자들은 열광했다. 그때만 해도 온라인 커뮤니티는 마이너(minor)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런 공간을 대선주자가 인지하고 있고, 직접 찾아와 인사까지 남겼으니 이용자들의 반가움과 뿌듯함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렇게 채워진 인정욕구는 한동안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을 열정적으로 지지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2010년대 초중반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가 맹위를 떨치긴 했지만 그래도 온라인 커뮤니티는 전반적으로 진보 우위의 공간이었다. 이들은 때때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에 힘을 보탰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디시인사이드 주식갤러리(주갤)'가 대표적이다. 당시 주갤 이용자들은 "최순실을 모른다"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말을 반박할 자료를 청문위원들에게 제보했고,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이를 받아 추궁함으로써 그의 사과를 받아냈다.
재미있는 건 적잖은 온라인 커뮤니티가 최근 몇 년간 급격히 보수화했다는 점이다. '문팍'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엠팍이나, 디시인사이드 다음가는 규모를 자랑하는 에펨코리아(펨코)가 대표적이다. 여전히 민주당에 굳건한 지지를 보내는 곳도 많다. 그러나 몇몇 대형 커뮤니티가 보수로 '전향'하면서 온라인상에서 진보 우위 구도가 무너졌다.
이로써 보수정당은 과거 보유하지 못했던 군사력을 얻은 격이 됐다. 지난해 초 국민의힘이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한 줄 공약을 내놓을 때가 그랬다. 기성세대는 한 줄짜리 성의 없는 공약에 납득하지 못했지만, 커뮤니티들은 엄청난 유행어와 패러디를 쏟아내며 윤석열 대선후보의 지지율 급반등을 이끌었다. 민주당은 직전 대선에서 우군이던 이들을 빼앗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 많던 진보 커뮤니티는 왜 민주당에 등을 돌렸을까.
DC의 등장과 '투표부대'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의 효시는 1999년 문을 연 디시인사이드(DC)다. PC통신 시절에도 동호회 같은 커뮤니티가 존재했지만, 요즘 같은 형태의 온라인 커뮤니티는 DC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DC는 사업가 김유식 씨가 PC통신 하이텔에 쓰던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리뷰를 웹에 올리면서 시작됐다. 소재에서 유추할 수 있듯 초창기 DC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 특히 전자기기에 관심 많은 2030 남성 중심의 공간이었다. 진보 색채도 강했다.2000년대 초반 DC의 정치색을 알 수 있는 사건이 2004년 3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다. 국회에서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자 역풍이 불었다. DC의 정치사회갤러리(정사갤)에서는 "총선에서 투표로 한나라당을 응징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른바 '투표부대'다. 이들은 온라인상에 각종 웹 포스터와 관련 노래를 배포했다. 반응이 어찌나 뜨거웠던지 2004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가 "‘투표부대가'라는 제목의 행진곡풍의 노래가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며 "탄핵 찬반 입장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투표부대의 활동에 힘입어 당시 열린우리당은 제17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진보 일색이던 DC의 분열은 엉뚱하게도 한 간담회에서 비롯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한나라당 대변인이던 전여옥 전 의원이다. 친노 성향이 강했던 정사갤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저격수로 유명한 전 의원을 초청해 간담회 자리에서 망신을 주겠노라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까지 지낸 공당의 대변인과 방에서 키보드나 두드리던 이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 될 리 만무했다. 결국 정사갤 회원들은 전 의원과의 토론에서 완패하고 그에게 훈훈한 간담회 사진만 남겨주게 됐다. '키보드로나 잘 싸운다'는 의미의 '키보드 워리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이날의 간담회를 계기로 정사갤은 급격히 우경화했다. 훗날 일베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된 이 사건을 네티즌은 '여옥대첩'이라고 명명했다.
남초 커뮤니티들의 '전향'
정사갤이 보수화된 이후, DC에서는 '막장'을 표방하는 갤러리(게시판)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선정적이거나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게시 글을 올리곤 했는데, 관리자가 자꾸만 삭제하자 게시 글을 아예 다른 사이트로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게 일베였다. 극우의 요람으로 평가받는 일베는 시작부터 많은 화제와 논란을 낳았다. 그건 이들의 탄생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이들은 진보, 여성, 특정 지역 등을 혐오하는 문화 코드를 생성하는 한편 위안부 모욕, 아동 포르노 공유 등 각종 사회문제를 야기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자극적 콘텐츠로 인해 이용자가 급증했다. 하지만 일베가 워낙 화제가 돼서 그렇지, 상당수 온라인 커뮤니티는 여전히 진보적 성향을 띠었다. 2010년대 중반까지는 그랬다.강력한 혐오는 그만큼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일베의 주요 혐오 대상이던 여성들의 반발이 컸다. 출판가에서는 '이갈리아의 딸들'로 대표되는 페미니즘 서적이 불티나게 팔렸다. 여성이 많이 모이는 여초 커뮤니티에서도 그와 같은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사실 '된장녀' '김치녀' 같은 여성 비하 발언은 2000년대 중반부터 존재했다. 그럼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건 그때는 온라인 세상의 패권이 남성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갈등은 한쪽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땐 불거지지 않지 않는 법이다. 초창기 여초 커뮤니티는 정치·사회 논쟁과 거리가 멀었다. 뷰티·패션·연애 등 생활 정보를 공유하는 폐쇄적 커뮤니티의 성격이 강했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면 "정치 이야기한다"며 차단되는 경우도 많았다.
일베가 각종 논란을 양산하면서 여초 커뮤니티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한 대로 되갚아 주겠다는, 이른바 '미러링'이 유행했다. 이때부터 세력 균형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2016년 여름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모르는 20대 여성을 살해했다. 살인 동기를 두고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라는 남성들의 주장과 "여성혐오 범죄"라는 여성들의 주장이 대립했다. 사건은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인가'라는 논쟁으로 이어졌는데, 이 때문에 남초·여초 커뮤니티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온라인에서 벌어지던 성별 갈등이 현실로 튀어나오고, 정치인들이 본격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논쟁 과정에서 당시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진보 진영이 사실상 여성들의 손을 들어주며 '일베 대(對) 다수의 진보 커뮤니티'라는 구도가 무너지고 '남초 대 여초'라는 새로운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2018년 혜화역 시위, 이수역 사건 등을 거치며 더욱 공고해졌다. 그때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정부·여당이 편향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분노가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허물고 있다는 걸 정부·여당에서 감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19년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엠팍처럼 20대보다 조금 윗세대가 애용하는 커뮤니티도 돌아섰다. 내로남불도 문제였지만 가장 중요한 건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에서 검찰개혁 외 다른 이슈가 실종됐다는 점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는 하지만,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의 명칭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사람들은 주로 정치보다는 유머 콘텐츠나 취미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이슈를 소비하는 건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원초적 본능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검찰개혁에 매몰되면서 그들에게 소구할 만한 '떡밥(인터넷 화젯거리)'이 사라졌다.
반면 툭하면 불거진 불공정, 부동산 논란은 사람들에게 직접 와닿았다. 이 이슈들은 민주당에 불리했다. 확고한 정치색이 있지 않은 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돌아설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다. 이처럼 최근 세 번의 선거에서 진보 진영이 패배한 이유는 정치를 놀잇거리로 삼고, 스스로 각종 콘텐츠를 생산해 유포하는 집단과 등을 돌리게 된 사실과 무관치 않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충성했던 '투표부대'가 2021~2022년에는 국민의힘을 위해 활약한 셈이다.
민생 이슈와 '밈' 없이 청년과 소통 못해
온라인 여론의 중요성을 인지한 정치권의 인위적인 개입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한때 3500명까지 조직을 키웠던 국정원 알파팀은 대표적 사례다. 그 반대편에는 드루킹이 있었다. 지난 대선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한준호 민주당 의원이 소위 '밭갈이(온라인 커뮤니티 여론 조작을 뜻하는 은어)'를 독려하는 홍보 영상을 올렸다가 빈축을 사기도 했다.
설령 불법적인 개입이나 '밭갈이'가 아니더라도 많은 정치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방문 인증 글을 올리거나 영상을 남기며 청년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대개 선거철에만 반짝 이뤄질 뿐, 선거가 끝나면 정치권의 시선은 다시 각자의 진영으로 향한다.
각 온라인 커뮤니티는 저마다의 맥락을 지니고 있다. 밈(meme·온라인에서 유행하는 문화나 현상)은 오랜 세월 정서와 언어가 축적되며 탄생한다. 이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청년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기성세대 정치인들이 무슨 유행어만 뜨면 다짜고짜 따라 하지만 청년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대부분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저마다 일정한 정치 지향성을 갖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2030 청년들은 '에펨코리아 하는 남자' '여성시대 하는 여자'라고 하면 그들이 선거 때마다 누구에게 투표할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정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한 코너일 뿐, 전부가 아니다. 상당수 이용자에게 온라인 커뮤니티는 자신의 정치 신념이 투영된 정치 공동체라기보다 화제를 살필 수 있는 저잣거리에 가깝다. 뭐 살 거 없나 저잣거리에 들른 사람에게 의금부가 어떻고 포도청이 어떻고 물으며 공감을 구해온 게 우리 정치의 모습이다.
혹자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국민의힘의 59초 쇼츠 생활 공약(‘만 나이' 통일 등)이나 민주당의 소확행 공약(탈모약 공약 등)이 가볍다고 비판했지만, 그 당시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보여준 뜨거운 반응은 그만큼 정치가 청년의 일상에서 멀어졌다는 걸 방증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온라인 커뮤니티로 청년들과 소통하는 게 대단히 어려운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저 그들의 일상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쓰면 된다.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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