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지피티는 묻는다, 어떻게 물을래
지난번 표지이야기(제1455호)에서도 다뤘지만 챗지피티(ChatGPT) 등장 이후 인간의 고유성과 교육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한편에서는 창의력과 같은 인간의 고유성이 ‘위협’받으면서 기술과 기계가 ‘절대’ 못하는 인간만의 영역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기술로서의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두고 ‘질문’을 구성하는 공학으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Prompt Engineering)에 대한 기술 도서가 쏟아지고 있다. 후자는 이제 질문을 구성하는 역량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량이라고 강조한다.
학생들에게 “질문해보라” 하니, 드러나는 역량 차이
이야기를 만드는 학생들의 경우에도 그 역량을 고스란히 드러나게 하는 과제가 질문과 관련한 것이다. 작품을 창작하면서 자기가 지금 맞닥뜨린 어려움에 대해 질문하라고 하는 과제다. 예를 들어 웹툰을 그리는 학생에게 지금 졸업전시회나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구상하고 기획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질문하라고 하면 대체로 자기 작품의 ‘개연성’에 대해 질문한다. 어떤 학생들은 매우 정교하게 작품의 어떤 장면과 어떤 장면이 자기가 생각할 때 어떤 이유에서 개연성 있게 연결되지 않는 것 같다며 질문한다. 질문이 분석적이다. 반면 어떤 학생들은 구상 전체에 대해 질문한다. ‘개연성’이라는 말로 답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닌 질문을 하는 것이다. 질문하라는 질문이야말로 학생들의 ‘내공’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이 과제를 낸 다음 학생들에게 반대로 질문하기도 한다. 작품을 분석하면서 이런 질문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묻는다. 예를 들어 이번 학기에 공연으로 올라갈 영국의 청소년 연극 <타조 소년들>을 연출하고 연기하는 학생들에게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왜 작품 내내 사건과 장면을 주도하는 인물 중 한 명이 빠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돌아가면서 각자 생각을 말하지만, 작품에 나오는 ‘대사’에 근거해 말하는 학생은 별로 없다. 주요 등장인물이다보니 이상하다고 생각해 질문이 머리에 떠오르긴 했지만, 근거를 갖고 질문을 질문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질문하는 역량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교육을 비판할 때 해답은 잘 찾지만 질문하는 역량은 못 키워준다는 점을 들곤 한다. 입시 위주 교육이 정답을 빨리 찾아내는 훈련만 시키지 무엇을 질문하고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하여 지금 시대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골라내거나 나아가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문제를 찾아내 문제로 설정하는 역량이야말로 가장 중요한데 한국 학생에게는 결정적으로 이 역량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해답 찾기 중심에서 문제 설정 역량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야기를 만들 때 이 문제는 동시대성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지금 시대에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이 글만 하더라도 현재 학생들의 질문하는 역량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쓰고 있다. 동시대에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이야기’ 형태로 공개적으로 사회에 제출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 대한 시민들의 폭발적 관심은 이 시대 한국 사람들의 학교 경험이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질문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유용한 도구
문제는 이 문제를 어떤 문제로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글은 현재 학생들의 문제 설정 역량을 문제화하는 글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한국 학생들 사이에 문제 설정 역량에서 어떤 현격한 차이가 있으며 왜 그런 격차가 나타나는지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될 수도 있다. 전자의 질문이 학생들의 문제 설정 역량을 하나로 묶어 학교 교육을 문제화하는 교육학적 문제 제기라고 한다면, 후자는 학생 사이의 격차와 그 이유에 대한 사회학적 문제 설정이 될 수 있다. 즉 문제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글의 ‘영역’이 달라지는 것이다. 글의 영역이 달라짐에 따라 해답을 찾는 과정이나 방식도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질문을 설정하는 역량이란 자기가 다루는 영역의 문제로 질문을 다듬을 줄 아는 것을 말한다.
또한 문제 설정의 중심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장르’가 달라진다. 중심이 된 질문에 따라 어떤 이야기는 아무리 끔찍한 장면이 많이 등장하더라도 ‘호러’나 ‘스릴러’가 아닌 ‘순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번 학기에 나와 함께 “사랑에서 호러가 제거될 수 있는지”를 공부하는 한 학생이 수업 중에 소개한 리디북스에서 ‘순정’이자 ‘공포/추리’로 분류된 시이나 우미 작가의 작품 <아오노 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처럼 말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작품을 할 때마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질문이 무엇인지” 묻고 그걸 “어떤 장르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지” 다시 질문한다. 양적으로 어떤 장면과 요소가 많이 나오더라도 다루려는 작품의 문제 설정이 ‘사랑’이고 그걸 로맨스로 풀어내고 싶다면 질문을 로맨스 장르의 속성으로 설정해야 한다. 장르적 속성이 너무 뒤범벅되는 것도 문제지만 ‘파괴’라는 이름으로 뒤죽박죽 사용하는 것도 문제다. (마찬가지로 최근 여러 비평가가 지적하는 장르의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비평이 난무하는 것도 문제다. 비평의 경우도 자신의 비평 중심 질문이 무엇이며 어떤 영역과 장르에 대한 것인지 비평하는 사람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문제 설정에 대해 가르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문제 설정에 따라 해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면서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문제 설정을 ‘직관’하게 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질문에 따라 대답의 영역과 장르, 그리고 수준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몇 가지 사례로 보여주더라도 그 사례들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는 어렵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한눈’에 보여야 하는데 사례를 아무리 구체적으로 들어봤자 개별 사례로 병렬돼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례를 듣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종합해야 한다. 이것은 고도의 지적 역량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챗지피티는 매우 쓸 만한 도구다.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답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직관’해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챗지피티에 “<갈매기의 꿈>의 저자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했을 때와 “<갈매기의 꿈>의 저자에 관해 이야기해달라”고 질문했을 때 대답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전자는 아주 짧게 리처드 바크를 소개하지만, 후자는 리처드 바크의 작품 세계를 제법 길게 설명해준다. ‘~에 관해’(about)를 하나 더 붙였을 뿐이지만 질문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바뀌면서 그에 따라 답도 달라진다. 질문의 중요성을 학생들이 직관적으로 깨닫게 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셈이다.
질문하는 자가 주인, 대답하는 자는 노예?
더구나 챗지피티에서 질문하는 자는 ‘모르는 자’로서 ‘아는 자’에게 질문하는 열등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질문과 대답은 두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을 역량이 ‘열등한 자’(배우는 자)와 ‘우월한 자’(가르치는 자)로 위계적으로 나눈다. 낮은 위치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청’해야 한다. 자칫하면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을 들을 수 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는 책에서 말했지만, 학교에서 교사나 동료 학생에게 질문했다 모욕당하는 경험이 반복되면 학생들은 질문하기를 그만두고 배움을 거부한다.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관계가 위계적으로 돼 모욕당할 위험이 증가할수록 배우는 자가 자존을 지키기 위해 배움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반면 챗지피티는 질문하는 자가 우월한 지위에 있다. 그는 ‘모르는 자’이지만 동시에 ‘명령하는 자’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자가 아니라 명령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자의 관계로 바뀐다. 질문하는 자와 대답하는 자의 위계가 학생과 교사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뒤집힌다. 로마 시대 귀족에게 학문을 가르친 것이 그리스인 ‘노예’였던 것을 상기시킨다. 이 경우 모르는 것은 전혀 부끄러움이 아니다. 질문하는 즉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노예의 역량 문제로 문제시된다. 여기서도 문제 설정이 달라지는 것이다.(여기서 현재 다루는 챗지피티의 윤리 문제가 전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챗지피티와 윤리 문제는 답변의 윤리적 문제나 저작권 등과 관련해 답변 활용에서의 윤리 문제가 주로 다뤄진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윤리 문제는 아마 인간이 비인격적 대화 대상자인 챗지피티를 대하는 것일지 모른다.)
물론 질문하는 자인 ‘인간’이 주인 위치가 돼 기계인 챗지피티에 대답을 명령한다고 해서 인간 내부의 위계와 차이가 해소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질문하는 역량’으로 이미 위계화된 인간 내부는 더욱더 격차가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질문을 분석적으로 던질 수 있는 역량이 챗지피티 해답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답의 질을 결정하는 데이터베이스는 압도적으로 영어로 돼 있다. 현재 상태에서는 분석적인 영어 문장으로 질문하는 역량이 대답의 질을 결정한다. 이 격차를 메울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한편에서는 인간 내부의 위계는 더 심화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계를 윤리적으로 학대하고 착취하는 가학행위가 늘어날 것이다. 그럴수록 또 하층계급의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방식과 내용에 대한 혐오가 중산층 이상에서 만연하며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질문하기를 어려워하고 막막해하는 학생들에게 좀더 다가서는 일이다. “질문하라”는 과제를 내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과제 수행하는 정도가 현격히 떨어진다. 반면 상위권 학생은 가짜로 만들어서라도 질문을 만든다. 자기가 정말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질문을 만들어내는 역량은 있다보니 짐짓 그게 가장 궁금하다는 듯이 질문을 만들어온다. 문장을 질문 형식으로 분석적으로 만들어내는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질문했다기보다는 질문 형식의 문장을 만들어 ‘대답’했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수행한 것으로 할 일이 끝났기 때문이다.
나의 질문이 무엇인지, 어떻게 나의 질문을 표현할지
과제를 아예 수행하지 않은 학생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궁금한 것이 없어서 안 하기도 하지만 한명 한명씩 차근히 물어보면 모르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또 그게 뭔지 알기는 하겠는데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라서 묻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밑줄을 그어 밑도 끝도 없이 제출하기도 한다. 성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막막해서 벌어지는 문제다(물론 무성의하게 하는 예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배우는 자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어가는 긴 여정이 시작돼야 한다. 챗지피티와의 대화가 대답을 찾기 위한 거라고 한다면,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모르거나 어려워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질문하기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대화가 ‘아직은’ 필요하다. ‘아직은’ 챗지피티가 배우는 자가 왜 질문하지 못/안 하는지, 질문 이전의 침묵을 살피며 헤아리는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말이다. 어쩌면 새로운 기술과 기술 사이에서 인간의 자리는 늘 그 ‘아직은’에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기술과 기계가 ‘절대’ 못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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