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스트레스 받는 일은 빨리 잊어…숙면·소식·절제가 건강 비결[100세 시대 名士의 건강법]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
주 1회 골프장 찾아 건강관리
타고난 건강 체질에 절제 생활
기분 좋으면 소주 2병도 마셔
회고록 ‘한국 현대사’ 집필 중
“책 읽고 글 쓸 때가 가장 행복”
독립운동 역사 알리는 데 앞장
“가해자 일본 이젠 용서해야”
초대 국가정보원 원장과 서울 종로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종찬(87)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은 대한민국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다. 우당 선생의 6형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의 희생적인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할 당시 전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600억 원(현재 시세)을 독립군 산실인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에 쏟아붓는 바람에 가족들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광복 후 5남 이시영 초대 부통령만 살아 돌아오고 나머지 형제들은 순국하거나 일제에 체포돼 옥사했다.
이처럼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독립운동사를 기리는 데도 각별한 애정을 쏟아온 이 이사장은 국회의원 시절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추진위원과 민주정의당 민족사관정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올바른 역사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이회영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우당기념관을 세우고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를 설립했으며, 현재도 우당장학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가족을 후원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아 지난해 기념관을 완공하는 등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념하고 알리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이 이사장을 지난 4일과 지난달 24일 서울 남산예장공원 내 이회영기념관에서 만났다. 언론을 통해 보던 모습보다 실물은 더 젊고 건강해 보였다. 지금도 주 1회 정도 건강을 위해 골프장을 찾는다. 스코어를 묻자 숫자보다는 건강관리 차원에서 즐기는 것이고 가급적 많이 걸으려고 애쓰는 편이라고 한다. 주량은 소주 1병, 기분이 좋으면 2병까지 마신다. 고혈압 수치가 약간 높아 약을 먹는 것 외에는 아픈 곳도 없다. 요즘도 강연 요청이 오면 지역을 마다하고 달려간다. 지난달 29일에도 전남 담양군 문화회관에서 ‘대한민국 100년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열린 제182회 21세기 담양포럼에 초청돼 1시간 30분 동안 서서 강연할 정도로 왕성한 체력을 과시했다. 건강비결을 묻자 “특별히 자랑할 건 없다”면서도 타고난 건강 체질에다가 나이에 맞는 절제 생활이 비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잘 먹고 잘 잔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특히 “건강하려면 스트레스받은 일을 빨리 잊어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다. 이 이사장은 잘 자는 게 타고 난 복이다. 하루 8시간 숙면을 취하고, 낮잠뿐만 아니라 저녁 식사 후에도 30분 정도 잔다. 이동 중 차에서도 잔다. “눈만 감으면 잠이 든다”고 말할 정도다. 104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와의 지난해 인터뷰에서도 그랬듯 8시간 숙면과 낮잠, 틈틈이 자는 것이 건강비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단짝 친구였던 부인 윤장순(86) 여사가 차려주는 식단대로 가리지 않고 먹는다. 다만 요즘 체중조절을 위해 소식하고 있다. 땅콩을 좋아해 즐겨 먹는 것도 특징이다. 과다할 정도여서 최근 양을 줄이고 있다. 중학생 시절부터 시작한 일기 쓰기도 지금껏 계속하고 있다. 취미란에 서슴없이 ‘신문 스크랩’이라고 적을 정도로 회고록 등 저술 활동에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이 이사장은 요즘 회고록 ‘한국 현대사’ 집필 삼매경에 빠져 있다. 지난 2015년 펴낸 ‘숲은 고요하지 않다’에 이어 두 번째 회고록이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모든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다”면서 그동안 메모하고 축적해 놓은 자료들을 정리해 출간할 계획이다. “책을 쓰기 위해 관련한 책을 읽고 자료를 정리하고 글을 쓸 때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몰려온다”고 했다. 오죽하면 부인이 ‘대입 수험생이 공부하듯 한다’며 건강을 걱정할 정도다.
이 이사장은 지난달 1일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3·1절 104주년 기념식에서 개회사에 이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나란히 앉아 주목을 받았다. 윤 대통령이 최근 ‘강제 징용 해법’과 새 한·일 협력 관계를 선언하며 한·일 정상회담을 한 것에 대해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견해가 궁금했다. 이 이사장은 “윤 대통령이 한·일관계가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번 윤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진정한 새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이사장은 야권의 ‘굴욕외교’ 비판 일색 기조와 달리 윤 대통령의 결단과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 “언제까지 죽창가만 부르며 과거에 얽매일 것인가. 이제 일본을 용서하되, 아픈 기억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이어 “옆구리 찔러 불가역적 사과를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고 반문한 뒤 대국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이 대목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할 때 ‘하나님 이들은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다”면서 “이런 정신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대중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거쳐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그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당시 국정원장 재임 중이었는데, 윤 대통령이 이를 계승하자고 밝힌 점은 참으로 적절했다”면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정신은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향해 함께 가자’다. 대단히 중요한 원칙”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정치 멘토인 이 이사장의 아들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윤 대통령과 55년 죽마고우다. 또 윤 대통령의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와도 가까운 지인이며 윤 대통령도 사석에서는 이 이사장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 대통령에 대한 일화도 들려줬다.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몇몇 지인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불렀는데, 다른 사람이 밥을 산다면 안 올 것 같아서 내가 사겠다고 하니까 나오더라”면서 “식사를 마칠 무렵 ‘아버지 먼저 가보겠습니다’하고 갔는데 나중에 밥값을 계산하려고 보니까 자기가 먹은 밥값만 내고 갔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웃었다. 그래서 나중에 전화해 “내가 밥을 산다고 했는데 왜 밥값을 내고 갔냐”고 했더니 ‘제가 검사하면서 먹은 밥값과 술값은 제가 냅니다’하고 답하더라고 전했다. 이처럼 “자기관리에 철저한 윤 대통령을 보고 그때부터 더욱 신뢰하게 됐다”며 “그 이후 그와 관련한 스캔들 의혹이 보도되면 믿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 이종찬 이사장이 걸어온 길
이종찬 이사장은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아버지 이규학(이회영의 아들)과 어머니 조계진(흥선대원군의 외손녀)슬하에 셋째 아들로 태어나 광복 이후 가족과 함께 귀국해 서울에 정착했다. 경기중·고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입교해 졸업과 함께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72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중국의 문화 정책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3년부터 영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해, 중앙정보부 국제문제담당 부국장, 총무국장, 기조실장을 두루 거치면서 10ㆍ26 사태 이후 중앙정보부 개혁에 앞장섰다.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중앙정보부를 떠났으며,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서울 종로ㆍ중구)에 당선돼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제14대 국회의원까지 내리 4선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정당 원내총무, 국회 운영위원장,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한영의원친선협회 회장, 한중문화협회 회장, 정무 1장관, 민정당 사무총장 등 중책을 역임했다.
3당 합당 이후 1992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불공정 경선에 항의해 경선을 거부하고 탈당했다. 같은 해 새한국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 및 대통령 후보에 선출돼 제14대 대선에 도전하기도 했다. 1995년 민주당에 입당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부총재를 맡아 1997년 제15대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돼 대한민국 최초의 여야 간 정권 인수ㆍ인계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으로 취임해 이듬해 ‘국가정보원’으로 명칭을 바꾸는 등 대대적인 개혁에 앞장섰다. 1999년 다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부총재로 위촉됐으며, 2000년 새정치국민회의가 해체됨과 동시에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고문을 맡았다. 이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동북아경제연구소와 하버드 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한국의 물류 발전 가능성 등에 관해 연구했다. 2005년 한국선진화포럼 창립에 참여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보국훈장 삼일장, 홍조근정훈장, 청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민족의 종을 울리며 민주의 탑을 쌓으며’(1987), ‘개혁과 온건주의’(1987), ‘디지털로 확 바꿔라’(2000), ‘세계로 가는 길목을 잡아라’(2002) 등이 있다.
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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