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서] '미군 철수' 주장하던 북, 첫 북미 고위급 회담서 보인 태도는
남북미, 핵사찰 문제로 '줄다리기'…끝내 파국
(서울=연합뉴스) 김효정 기자 = 탈냉전 직후 북한 핵 문제가 국제무대에 외교 이슈로 막 등장하던 1992년 북핵 해결을 둘러싼 남·북·미의 치열한 '줄다리기'를 엿볼 수 있는 외교문서가 6일 공개됐다.
1991년 말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이라는 화해 무드를 배경으로 그 해 북미는 사상 첫 고위급 접촉을 갖고 북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그러나 양측은 핵사찰을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했고, 결국 이듬해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제1차 북핵 위기'의 시작이었다.
김용순·캔터 첫 고위급회담…미, 중국에 협조 요청도
1992년 1월 22일 당시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과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은 뉴욕 유엔주재 미국대표부에서 머리를 맞댔다.
이날 회동은 한국전쟁 이후 북미 간의 사상 첫 고위급 회담이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당시 북미 대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대부분 비공개 처리됐지만 회담 전후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문서들이 여럿 공개됐다.
특히 김용순은 이 만남에서 '북미가 수교하면 주한미군 주둔도 용인하겠다'는 식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주한미군 관련 언급이 있었음을 외교문서에서도 엿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김용순·캔터 회담으로부터 약 두 달 뒤인 3월 14∼17일 방한한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상옥 외무장관에게 "캔터 차관-김용순 접촉 시 북측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안정의 요소(source of stability)로 인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언급은 북미 직접대화에 대한 한국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미국도 대북 핵사찰에 참여하겠다고 제의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남북대화 틀 속에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노태우 정부는 한국은 빠진 채 북미가 직접 핵문제를 푸는 것을 경계했다.
솔로몬 차관보는 이 외무장관에게 "(북한은 미국이 참여하는) '3자 사찰'도 수락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말했다.
이어 "핵사찰이 한국 내 미군기지에 중점을 두고 실시될 경우, 미국이 대북한 사찰에 참여치 못하게 되면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미 행정부에 있다며 "미국의 핵사찰 참가는 모든 당사자들이 의심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관건"이라고 밝혔다.
남북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상호 사찰에 합의했는데, 미국도 대북 사찰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러나 이 장관은 "3자 사찰 참여 문제는 계속 협의가 필요할 것"이라며 유보적 반응을 보였다.
미국이 북한과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중국에 영향력을 요청한 상황도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1년 12월 23일 미 국무부 부장관은 첸치천(錢其琛) 당시 중국 외교부장에게 서한을 보내 북미 고위급 접촉에 대한 중국의 협조를 청하며 "메시지가 북한 정부 최고위 레벨에 전달되도록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사찰문제로 핵문제 답보…북, 연합훈련 재개하려하자 고위급회담 제안
1992년 내내 한미가 북한에 공식적으로 요구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간 상호 사찰'이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임시사찰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핵의혹 해소에 충분치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미는 남북 상호사찰 실현을 북미관계 개선의 사실상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캔터 차관은 그해 4월 김용순 서한에 답신을 보내면서 "IAEA에 의한 국제 사찰과 남북한 합의에 따른 상호 사찰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미·북한 고위급 정책 협의를 정례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나타났다.
캔터 차관은 같은 해 5월 서울에서 이 외무장관을 만나 "올바른(right) 사찰과 빠른(on time) 사찰 둘 중에 택일하라고 한다면 비록 늦으나 올바른 사찰이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북간 상호 사찰에 회피적 태도를 보였다. 아울러 남한 내 미군기지 사찰을 주장하며 영변 핵시설 외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사찰은 거부했다.
북한은 1992년 4월 IAEA 핵안전조치협정을 비준하고 5월 이에 따른 최초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영변에 건설 중이던 방사능화학실험실(재처리 시설)을 새롭게 보고한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안기부의 비공식 평가는 상기 방사능 화학연구소가 핵재처리시설을 말하는 것'이라는 수기 메모가 당시 외교문서에도 등장한다.
핵 문제가 답보하는 가운데 한미가 연초 중지했던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방침을 밝히자 북한은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11월 워싱턴을 방문한 허종 주유엔 북한 차석대사는 카트먼 국무부 한국과장과 면담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고할 것을 수차례 요구하고, 그해 12월에 훈련 문제 해결을 위한 고위급 회담을 다시 갖자고 강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 미수교국 관계개선 공세…남측 우방국 단속 총력
남북은 세계 각국을 상대로 치열한 '장외 대결'도 펼쳤다.
북한은 남북한 유엔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IAEA 핵안전조치협정 비준 등 한반도 상황 변화를 활용해 미수교국 수교 등 관계 개선을 위한 공세를 폈고, 한국 정부는 재외공관망을 통해 이를 총력 저지하려 애썼다.
외무부 본부는 1992년 2월 모든 재외공관에 우방국이 수교에 앞서 남북 동시사찰 실시 등 핵문제와 남북관계 진전을 북한에 요구하도록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북한은 중남미와 유럽 등에 특히 공을 들였는데, 일례로 칠레 외무장관이 1992년 9월 유엔에서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과 회동하고 한국과 사전협의 없이 전격 재수교에 합의하자 한국 대사가 강하게 실망과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북한 외교부 구주국장이 같은 해 5월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영국 등 서유럽을 순방하고 외교관계 수립을 요청하자 한국 정부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북한은 또 남북 기본합의서 발효 직후 김영남 외교부장 명의로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태국 등의 외교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유엔사 존속이 타당성을 상실했다며 유엔사에서 군사요원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해당 국가들은 남북간 항구적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관련 당사국이 유엔사 역할이 필요 없다고 합의할 때까지 유엔사는 존속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kimhyo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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