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전 외교 문서 속 ‘모가디슈’…영화보다 극적인 ‘남북 탈출기’
"고립된 도시, 목표는 탈출!"
2021년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는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주 소말리아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들의 탈출기라는 실제 사건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날아드는 총알 속에서,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과 교민 등 7명은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 공관원 1명이 총에 맞아 숨지기도 했습니다. 오늘(6일) 세상에 공개된 32년 전의 외교문서에는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일촉즉발의 당시 전말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 약탈·총탄…끝나지 않는 내전 속, 대사관저에 갇힌 사람들
1990년 12월 시작된 모가디슈에서의 정부군과 반군 사이 시가전이 심상치 않자 외교부 본부는 1991년 1월, 주소말리아 대사에게 "공관원 가족을 인근 제3국으로 대피토록 조치 바람"이라는 내용의 긴급 전보를 보냅니다. 하지만 주소말리아 대사관은 이미 교신 불통 상태로 전보를 받지 못하는 상황. 주 소말리아 미국 대사관은 일찌감치 대피했고, 우리 외교관들은 관저에 갇혀 탈출하지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었습니다.
내전은 계속되고, 수도는 민가 약탈과 사방에서 날아드는 총탄으로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대사와 공관원, 교민들이 숨어있는 관저에 무장 강도가 3차례나 총을 들고 진입을 시도하는 등 당시의 긴박한 상황은 외교부 본부에 전달된 전문에 생생하게 담겨있습니다.
■"한국인 21명 중 북한인 14명"…영화 같았던 '남북 동거'
이탈리아가 모가디슈 현지로 군용기를 보내 한국 외교관들을 태우려 시도했지만 대사가 오기를 기다리던 공관원들이 군용기에 탑승하지 못하는 등 모가디슈 탈출에 잇따라 실패하던 상황. 그러던 중 본부는 주 이탈리아 대사로부터 "한국인 전원이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들어갔다"는 긴급 전보를 받게 됩니다. 이 전보에는 "남한인이 7명, 북한인이 14명"이라는 보고가 포함됐습니다.
어떻게 남북이 손을 잡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진입하게 된 걸까요? 당시 전보를 보면, 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무장강도의 침입으로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공항 대합실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주 소말리아 한국 대사였던 강신성 대사는 북측에 "관저에서 함께 지내며 함께 탈출을 시도하자"고 제안했고, 북측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한국 관저에서 우리 교민들과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먼저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찾아와 구조를 요청했다는 영화 속 장면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 "나만 믿고 내 집 와있는 북한 사람 버릴 수 없어…'함께 탈출' 간청"
그러던 중 이탈리아 측은, 한국 국민들을 태울 수 있는 구호기를 마련했다며 자리가 많지 않으니 남한 사람들만 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합니다. 강 대사는 전문에서 "나만 믿고 내 집에 와있는 북한 사람을 버리고 우리만 떠날 수 도저히 없으니 모두 함께 떠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간청했다"고 밝혔습니다. 강 대사의 설득 끝에 남북이 함께 이탈리아 대사관 진입을 시도하지만, 이탈리아 대사관 3백 미터 앞에서 그야말로 '영화 같은' 총격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역시 당시 외교본부로 날아온 전문에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케냐 몸바사에 무사히 도착한 남북 일행. 강 대사는 무사 탈출의 기쁨을 북측과 함께하고자 했지만, 생사의 선을 넘나들었던 이들은 그 자리에서 곧장 헤어지게 됩니다.
■'관저 하룻밤' 당시엔 공개 안 돼…"정치적인 이야기 삼갈 것"
이번에 공개된 당시의 외교문서를 보면, 정부는 남북이 함께 모가디슈를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공개하면서도 그들이 함께 관저에서 1박을 했다는 등의 사실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해당 북한 공관원의 신변에 위협이 될 수 있고 남북 대화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우려했기 때문인데요.
강 대사는 전문에서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한 긴박한 상황을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의 딱한 처지를 우리가 악용한다는 인상을 줄 언행과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은 회피했다"고 밝혔습니다. 그 밖에도 북한 대사를 반드시 강 대사와 같은 1호차에 타게 하고 식품과 생필품을 공평하게 나눠 쓰며 정치적인 이야기는 삼가는 등 극한의 상황에서도 북측을 배려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이후 강 대사는 매체를 통해, 통일이 되면 당시 함께 탈출했던 북한 공관원들을 다시 찾아보고 싶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이세연 기자 (sa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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