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 시즌의 이용규, 여전히 파랗게 날을 세웠다
[OSEN=백종인 객원기자] 이민호의 시즌 첫 등판이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1회 첫 타자부터 징글징글하다. 어디 한 군데 만만한 구석이 없다. 카운트 1-1. 이것저것 찔러 본다. 3구째 체인지업(135㎞), 4구째 슬라이더(141㎞), 5구째 포심 패스트볼(147㎞), 6구째 다시 슬라이더(142㎞). 하지만 쓸 데 없는 일이다. 모조리 잘려 나간다(커트 파울). (5일 고척돔, LG-키움전)
7구째를 앞두고다. 포수(박동원)가 타자의 동태를 살핀다. 그리고는 사인 교환이 이어진다. 손가락 3개, 4개, 검지만 1개, 5개…. 좌우 코스까지 포함하면 5~6개의 신호를 마운드로 보낸다. 그만큼 골치 아픈 타자라는 뜻이다.
망설임이 길어지자 타자가 멈춘다. 타임을 부르고 타석에서 빠진다. 결국 고심 끝의 선택은 커브였다. 123㎞짜리가 어정쩡한 높이로 걸린다. 배트가 용서할 리 없다. 매섭게 돌아가며 깔끔한 타이밍을 만든다. 우익수 앞에 넉넉한 빨랫줄 하나가 널린다.
SPOTV 양상문 해설위원은 구종 문제를 지적한다. “지금도 이용규 선수가 커트, 커트하면서 카운트를 끌고 나갔는데, 이민우 선수가 최근에 만들었다는 느린 커브를 던졌잖아요. 제가 볼 때 이거는 볼 배합의 미스라고 보여집니다.”
배터리 역시 허탈한 표정이다. 그런데 아닐 것이다. 아마 무슨 공을 던져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악착같이, 끈질기게, 계속해서 괴롭혔으리라.
문제는 출루 하나가 만들어낸 나비 효과다. 다음 김혜성 타석이다. 5구째 타격은 잘 맞은 땅볼이다. 유격수 정면으로 빠르게 구른다. 아무리 빠른 주자라도 병살 플레이가 가능한 속도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긴다. 다리 사이로 얌전하게 알을 깐다. 골든글러브 수상자 겸 국가대표 숏스탑(오지환)이 말이다.
깨끗하게 청소될 주자가 둘이나 남았다. 상황은 졸지에 무사 1, 3루로 변한다. 와중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1루 주자의 표정이다. 공 빠지는 걸 보더니 3루까지 달린다. 마치 세상 모든 게 걸린 것 같다. 온 힘을 쥐어 짜는 얼굴로 전력 질주다. 그리고 앞 슬라이딩으로 몸을 던진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이제부터다. 다음 타자(김웅빈)가 힘 없는 땅볼을 투수 앞으로 굴린다. 3루 주자의 홈 인은 어림도 없는 타구다. 하지만 뭔가 잘못됐다. 거의 자동으로 스타트가 이뤄진다. 객사할 팔자다. 런다운은 불가피하다. 포수와 3루수 사이에 주자가 갇혔다.
그러나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때부터 또 몸부림이다. 자신이 살 가능성은 없다. 다만 타자가 2루까지 갈 시간은 벌어주겠다는 왕복달리기다. 그 사이 또 실수가 나온다. 3루수가 공을 떨군 것이다. 인질이던 주자는 기사회생이다. 또 한 번의 앞 슬라이딩. 이날 승부를 책임진 득점이 올라간다. 겨우 1회 말이다. 그런데 벌써 유니폼은 흙투성이다.
지난 1월이다. 히어로즈의 전지훈련 명단이 발표됐다. 캠프는 두 곳에서 치러진다. 본진은 미국 애리조나 스카츠데일로 떠난다. 또 한 그룹의 행선지는 대만 카오슝이다. 38세 최고참은 후자에 속했다.
고형욱 단장은 애써 포장해준다. “미국과 대만이 1·2군으로 나뉜 것은 아니다. 대만에서는 그곳 프로팀들과 연습경기를 10경기 이상 진행할 예정이다. 실전이 필요한 선수들 위주로 명단을 짰다.” 애리조나의 홍원기 감독도 틈틈이 립서비스를 잊지 않는다. “대만파가 합류하면 더 좋아질 것이다.” 그 중 이용규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물론이다.
그에게는 쉽지 않은 겨울이었다. 연봉은 4억원에서 3억원으로 깎였다. 팀내 가장 큰 삭감률이다. 정규 시즌 성적을 보면 할 말이 없다. 타율은 겨우 0.199(271타수 54안타), 2할도 못 넘긴 건 신인 때(2004년)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이번 개막은 다르다. 쾌조의 스타트다. 4게임 중 멀티 히트가 3차례나 된다. 17타수 7안타. 타율 0.412로 팀내 최고를 달리는 중이다. 2일 한화전에서는 3루타도 기록했다. 5일 LG전은 결승 득점의 주인공이 됐다.
사실 히어로즈의 현재 상황은 최악이다. 부상자 속출로 비상이 걸렸다. 송성문의 장기 이탈이 불가피하고, 전병우와 원종현도 병가를 신청했다. 게다가 팀의 간판 이정후마저 결장이 계속된다. 여기에 수비도 흔들리며 8개의 최다 실책을 기록 중이다.
악재 속에서도 히어로즈는 선방하고 있다. 3승 1패로 단독 선두를 지켜낸다. 끈끈한 덕 아웃 분위기는 변함없다. 이를 악물고 뛰는 독종 고참 덕이다.
시즌을 준비하며 그가 했던 말이다. “작년에는 스윙이 말도 안되게 무너졌다. 때문에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했다. 올해는 그라운드 안에서 도움이 되는 선배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착실히 준비했다.” 어느덧 38세 시즌이다. 그럼에도 그의 야구는 여전히 파랗게 날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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