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약하지만 가장 강한, 예술의 힘 [광주비엔날레 2023]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주제로
[헤럴드경제=(광주) 이한빛 기자] 동시대 지구인들이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들이 있다. 기후변화, 인종갈등, 가부장제, 민주화, 점점 더 정교해지는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 “예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그러나 예술의 힘으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비 직접적이고, 은유적으로 오히려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나” 이숙경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은 부드러운 전복을 제안한다. 혁명이나, 제도가 달성할 수 없는 것, 바로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아시아 최대 비엔날레인 광주비엔날레가 개막한다. 6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7일 공식오픈하는 행사는 오는 7월 9일까지 94일간의 여정을 시작한다. 본전시가 열리는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을 시작으로 국립광주박물관, 호랑가시나무아트폴리곤, 무각사, 예술공간 집에서 본전시가 열리고 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등 9개국이 파빌리온을 운영한다. 사실상 광주시 전역에서 현대미술제가 열리는 셈이다.
올해의 주제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도덕경에서 차용한 문구다. 이숙경 테이트모던 국제 미술 수석큐레이터가 예술감독을 맡아 어찌보면 가장 약하고도 말캉한 고데기인 ‘예술’이 갖는 강력한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흐르고 사라지고 스며드는 물의 속성을 그대로 닮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공부했고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경계인·소수자·외부인으로 살았다. 이번 전시는 서양주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결과물이다” 이 감독은 우리가 사는 지구를 저항과 공존, 연대와 돌봄의 장소로 상상해보자고 말했다.
광주비엔날레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광주정신이다. 민주화 성지로 요약되는 광주는 그래서 한계가 명확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러나 올해 전시에선 광주를 직접적으로 기리는 작품이 없다. 작품의 저변에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깔려있을 뿐이다. 드러내지 않은 욕망은 강력한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흙더미와 밧줄로 이루어진 숲을 만나게 된다. 안쪽에서는 불레베즈웨 시와니의 영상 ‘영혼 강림’(2022)가 상영되고 있다. 묵직한 흙 냄새를 지나 영상에 가까이 가면 꽤 넓은 크기의 수조가 펼쳐진다. 양쪽 벽과 수조에 같은 영상이 시차를 두고 이어진다. 시와니는 죽은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영적 치유자 ‘상고마’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이 여전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가부장제로 인한 2중 억압에 처한 그는 직접적인 저항 대신 선조 아프리카 여성들의 삶을 따라간다. 땅의 본질을 해치지 않으며 필요한 것을 얻는 방식으로 균형이 깨진 현시대에 스스로가 대안이 되는 것. “땅이 우리를 치유하는 힘을 선물로 내어줬음을 깨닫는 일”이라는 작가는 시적인 영상으로 억압에 대한 반작용을 말한다. 모든 형태의 억압에 대해 저항하고 연대하며 민주주의와 자유를 갈망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광주에 한발짝 더 다가가는 시도도 있다. 초상화를 주로 그리는 알리자 리젠바움은 5·18이후 2년 뒤설립된 놀이패 ‘신명’의 멤버를 그렸다. 5·18 당시 죽은 사람들과 유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위로를 전하는 ‘언젠가 봄날에’(2010)라는 마당극을 하는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격정과 공감사이의 관계를 포착해낸다. 드레스리허설이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에도 배우들은 캐릭터를 내려놓지 못한다. 어머니는 장성한 아들의 무릎을 베고 눈을 붙였고, 아들은 어머니의 어깨를 감싼다. 배우는 사라지고 배역만이 남아 진한 아픔을 전한다.
그런가하면 관객을 작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김구림은 여성모델들의 신체에 장식적 문양을 넣고 구슬과 레이스를 붙였던 ‘바디페인팅’(1969)을 참여형 퍼포먼스로 선보인다. 이건용은 1976년 시작한 ‘바디스케이프 76-3’연작을 관객의 손을 빌어 완성시킨다. 이승택은 관객들이 노끈과 밧줄을 만져보고 재구성할 수 있는 조각작품 ‘무제(이 물건으로 무엇을 만들어도 좋습니다)’(1967=1970/2023)로 관객의 참여를 장려한다.
잃어버리고 삭제된 맥락의 복원을 시도하는 작업들도 인상적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앨런 마이컬슨은 굴껍데기를 쌓아놓고 그 위에 뉴욕 맨하튼의 풍경을 투사한다. ‘패총’(2021)이라는 작업에서 작가는 400년전 맨하튼에 네델란드인들이 도착하기전부터 지역민이 살고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해양오염이 심각해지기 전까지 뉴욕은 굴이 많이 생산되던 곳이었다. 수 세대애 걸쳐 지역민에게 먹을거리가 되었던 굴을 통해 잊혀진 역사를 복원한다.
아벨 로드리게즈는 아마존에서 계속되는 폭력사태를 피하기 위해 보고타로 이주한 콜롬비아 남부 노누야 민족의 후손이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아마존에 대한 지식을 드로잉으로 변환했다. 아이누족 작가 마윤키키는 텍스트와 아카이브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선주민으로 일본 사회내에서 평생에 걸쳐 경험한 다양한 형태의 경계를 탐험한다.
전시는 저항, 해체, 탈식민주의, 생태, 환경을 가로지르며 연대와 사유, 포용, 회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주제 집중도가 높으면서도 관람객의 완급과 호흡을 조절한다. 외부 전시장도 각 공간의 특성에 맞는 작업들이 배치됐다. 국립광주박물관엔 유물과 조응하는 작품이, 무각사엔 관람객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작업들이 선보인다. 다만 광주라는 역사적·정치적·산업적 맥락이 강한 장소들은 아니라는 점은 아쉽다. 앞선 비엔날레에서 활용됐던 옛 국군광주병원은 장소가 갖는 막강한 역사적 의미에 전시가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2022년 부산비엔날레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산업사의 중요 장소였던 부산항 제1부두를 전시장으로 쓰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성을 획득한 바 있다.
한편, 올해부터 광주비엔날레는 전시에 참여한 작가 중 1인을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황금비둘기상)’에 선정한다. 박서보 작가가 후배 작가들을 위해 100만달러(약 13억원)를 쾌척했고, 이를 기금삼아 매년 수상자에게 10만달러(1억 3000만원)을 수여할 예정이다.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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