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쌀 돌려깎기…식당 '사케' 한 병이 40만원인 이유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정영효 2023. 4. 6.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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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산업이 어때서'…日 강소기업 탐방 (5)
중상급 사케로 최상급 사케를 넘는다
영세 양조정미기 회사서 세계 최대 곡물가공기업으로
쌀을 모양 그대로 깎는 편평정미 기술
정비보합 60으로 50과 같은 맛과 향 낸다

정미기라면 쌀겨가 사방에 튀고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소음이 심한 동네 방앗간 풍경을 떠올리기 쉽다. 정미기로 부가가치를 얼마나 올릴 수 있을 지도 의문스럽다.

세계 최대 정미기 회사인 사타케의 신형 정미기는 대당 가격이 10억엔이다. 1시간에 8t의 쌀을 정미할 수 있다. 40만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 본사에 전시된 신형 정미기는 전시관에 넣기 위해 축소 제작된 것이다. 실제 정미공장에 납품하는 제품은 훨씬 규모가 크다. 

최근의 정미기는 현미를 깎아서 백미로 만드는 정미 자체보다 선별 기능이 더 중요하다. 위생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 수준이 훨씬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벌레와 알을 골라내는 건 기본이다. 무게 센서와 시각 센서를 장착해 앞면은 괜찮아 보이는데 뒷면에 상처가 났거나 색이 변한 것까지 선별한다.

쌀 한 포대 분량의 불순물을 약 1분만에 골라낸다. 불량미는 뜨거운 압력으로 불어낸다. 이 기술을 통해 곡물 뿐 아니라 김에 섞인 작은 새우, 불순물, 벌레 먹은 아몬드 등도 선별이 가능하다.

정미기의 핵심 부품은 모터다. 사타케는 100년 넘게 정미기를 만들면서 쌓은 노하우로 독자적인 모터를 개발했다. 정미기용 모터는 작은 전류로도 시동이 잘 걸리면서 곧바로 큰 동력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소형 발전기로도 고출력을 내는 모터는 정해진 공간에 많은 기능을 집약시켜야 하는 초고층빌딩과 고속철도에 적격이다. 오늘날 사타케의 모터는 롯폰기힐스와 같은 초고층 건물의 소화설비에 사용된다. 도쿄와 도호쿠 지역을 오가는 신칸센인 하야부사호(E5 계통)에도 사타케가 개발한 모터가 장착된다.

사타케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양조용 정미기 사업의 비중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현재는 사타케 전체 매출에서 양조용 정미기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0%에도 못 미친다. 그런데도 사타케는 비주력 사업으로 취급하는 대신 모태사업으로 투자를 계속했다.

오하시 나오 사타케 홍보 주무는 "사타케의 뿌리가 사케 정미기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라며 " (그것이 사타케에 주는 의미는) 무겁다"고 말했다.

뿌리를 충실히 이어나가기 위해 수년에 걸쳐 개발한 기술이 편평정미(扁平精米)다. 주조용 쌀을 40%만 깎고도 50% 깎은 것과 같은 맛과 향을 낼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다. 쌀을 40%, 50%까지 깎을 수 있는 동력 정미기를 개발함으로써 사케의 등급을 처음 탄생시킨 사타케가 이제는 사케의 등급을 파괴하는 게임 체인저가 된 셈이다.

쌀을 많이 깎을 수록 향과 맛이 더 좋은 사케를 만들 수 있는 건 쌀알의 구조 때문이다. 쌀알은 가운데의 색이 진한 전분을 반투명한 하얀 단백질이 감싸고 있다. 술 빚기는 쌀알의 전분을 발효시켜 당분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전분을 둘러싼 단백질은 맛과 향기를 떨어뜨린다.사케를 만들 때 쌀을 깎는 이유이다.

많이 깎아서 단백질이 적으면 적을 수록, 가운데 전분만 남을 수록 맛과 향이 깊은 고급 술을 만들 수 있다. 쌀을 40% 이상 깎아서 만든 긴조보다 50% 이상 깎은 다이긴조가 고급으로 대접받고 훨씬 비싸게 팔리는 이유다.

이처럼 차이가 명확한데 어떻게 긴조로 다이긴조를 이기는 술이 가능할까. 그것은 쌀의 모양이 원형이 아니라 기다랗고 동그스름한 타원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양조용 정미 기술로는 쌀을 원형으로만 깎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원형인 쌀을 원형으로 다이긴조의 기준인 50% 이상 깎으면 단백질 부분이 깔끔하게 정리되진 않는다. 반대로 쌀을 깎는 이유인 전분까지 일부가 잘려 나가는 낭비도 발생한다. 이 비효율성을 해소할 순 없을까. 쌀을 둥글게 깎지 않고 쌀의 모양을 살려 타원형으로 깎으면 불필요한 단백질은 완전히 제거하고 필요한 전분만 오롯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아이디어는 1990년대 초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기술이 없었다. 이론 상으로만 존재하던 이상적인 정미보합(쌀 깎기)을 현실로 만든 기업이 사타케다. 그 기술이 4년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2018년 내놓은 편평정미다. 

쌀을 타원형 그대로 깎아서 단백질은 최대한 제거하고 전분은 최대한 살릴 수 있게 됐다. 편평정미로 40%를 깎은 쌀(정미보합 60)에는 기존의 정미법으로 50%를 깎은 쌀(정미보합 50)과 같은 양의 전분을 얻을 수 있다. 긴조용 쌀로 다이긴조급 사케를 만들 수 있는 이유다.

최근 일본에서는 한국과 중국 등 사케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해 정미보합을 극단적으로 낮춘 사케가 생산된다. 공항 면세점의 사케는 '정미보합 23' '정미보합 30'을 내세운 제품도 흔하다. 쌀을 77% 깎고 남은 23% 만으로 담근 만큼 값도 비싸진다. 한국의 고급 식당에서는 한 병에 40만~50만원에 팔린다. 

정미의 원리를 이해하고 보면 정미보합을 터무니없이 낮춘 사케가 얼마나 허무한 상술인지 알게 된다. 정미보합을 불필요한 수준까지 떨어뜨린 사케가 더 우수한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많이 깎은 쌀일 수록 마찰열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서 건조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필요한 전분까지 제거하는 낭비도 발생한다.

히로시마=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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