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듣는, 한국 최초 우주인의 조금 ‘낯선’ 이야기

김연희 기자 2023. 4. 6.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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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우주인이 된 이소연 박사가 자신의 우주 경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책을 통해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원망이나 해명이 아니라 진솔함을 택했다.
이소연 박사가 국제협력 업무를 맡고 있는 국내 한 스타트업에서 <시사IN>과 인터뷰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2008년 4월8일이었다.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소유즈 로켓은 재빠르게 치솟더니 발사 후 9분 만에 포켓에 실려 있던 소유즈 우주선을 목표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틀 동안 지구를 돌며 차츰차츰 고도를 높여가던 소유즈 우주선은 4월10일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랑데부를 마쳤다. 소유즈 우주선과 도킹한 국제우주정거장의 해치(우주선의 출입구)가 열렸다. 생방송 카메라를 통해 한국어 인사가 지구로 전해졌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우주입니다!”

그날로부터 15년이 흘렀다. 당시 카이스트 대학원생이던 이소연의 삶도 굽이쳐 흘렀다. ‘한국 최초 우주인’이라는 타이틀은 그를 드높은 우주로 이끌기도, 깊은 굴레에 빠트리기도 했다. 전 국민의 관심을 받은 ‘대한민국 우주인 프로젝트’는 후속 사업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단발성 사업으로 끝이 났다. 우주인 사업을 제안하고 계획한 사람들은 따로 있었지만 모든 비난과 책임은 ‘최초 우주인’에게 쏠렸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려는 이소연 박사의 행보는 ‘먹튀’ ‘우주 관광객’ 같은 자극적 단어들로 뒤덮였다. ‘국적 포기’처럼 일찌감치 거짓으로 드러난 가짜뉴스들도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우주에서 돌아온 지 15년 만에 펴낸 책 〈우주에서 기다릴게〉에서 이소연 박사는 자신만이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원망이나 해명이 아니라 진솔함을 택한 그의 목소리는 그동안 너무 잘 안다고, 뻔하다고 생각했던 한국 최초 우주인 스토리에 낯선 질감을 더한다. 그가 국제협력 업무를 맡고 있는 바이오 스타트업 ‘노을’ 사무실에서 3월20일 이소연 박사를 만났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국제우주센터, 대한민국, 미국 등 인터뷰는 종행무진 지구와 우주를 누볐지만 어떤 장면을 회상하든 특유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우주인으로서 본격적인 얘기가 담긴 첫 책이 이제야 나왔다.

비행하기 전에도 모든 과정을 책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우주에 다녀오고 몇 년간은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었다. 진솔한 책이 되려면 디테일한 경험과 감정이 묻어나야 하는데 지치고 화도 난 상태였다. 지난해쯤에 지인이 이제 15년이 돼가는데 친구들에게 얘기하듯 담담하게 써 내려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먹었다.

우주로 나가기 전 이소연 박사가 해양 생존 훈련을 받던 모습. 소유즈 우주선 귀환 모듈을 바다에 던져놓고 훈련을 한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러시아 훈련소 생활부터 시작한다.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40㎞ 떨어진 곳에 ‘즈뵤즈드니 고로도크’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영어로는 ‘스타 시티’, 우리말로는 ‘별의 도시’이다. 이곳에 있는 ‘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센터(GCTC)’에서 2007년 3월부터 1년 동안 훈련을 받았다. 최초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이 실제 이곳에서 훈련을 했을 만큼 전통이 깊은 우주인 양성기관이다.

가가린 훈련센터와 숙소는 러시아 공군부대 내에 있다. 적응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우주인들에게 가장 힘든 훈련이 뭐였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외국어라고 답한다. 국제우주정거장에 가려면 영어와 러시아어를 배워야 한다. 나도 훈련 기간 러시아어를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 우주에 가기 전에 우선 부대 내에서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말이 ‘스타 시티’이지 사실 도시 전체가 러시아 공군기지다. 워낙 작은 사회인 데다 소비에트연방 시절의 문화가 남아 있어서 영어가 거의 통하질 않는다. 특이한 게 구내식당에 자리가 사실상 다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 자리에 감자, 닭, 소고기 이런 단어를 러시아어로 써서 붙여놨다. 아주머니가 오셔서 못 알아들으면,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거는 싫다는 러시아 말로 “니엣(아니)”, 좋으면 “다다다(응)” 한동안은 그렇게 주문을 했다.

또 어떤 훈련을 받았나?

초반에는 러시아어 수업과 함께 이론을 익혔다. 생명 유지 장치를 비롯해 우주인이 사용하는 기기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등을 배운다. 그다음 비행 시뮬레이션 훈련을 한다. 훈련소에 소유즈 우주선과 똑같이 만든 시뮬레이터가 있는데 발사해서 어느 고도를 지날 때 창밖으로 보이는 장면까지 모니터 화면으로 띄워놓는다. 우주복을 착용하고 들어가서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이 시뮬레이션을 한다.

훈련 과정에서 제일 중요시되는 임무는 우주인의 생존이다. 비상 상황에 대비해 실전처럼 산악 생존 훈련, 해양 생존 훈련을 다 받았다. 해양 생존 훈련은 흑해에 소유즈 우주선을 던져놓고 빠져나오는 연습을 한다. 소유즈는 경차 뒷좌석 정도 공간에 우주인 세 명이 탑승한다. 같이 우주에 나갈 우주인 세 사람이 한 팀을 이뤄서 훈련도 함께 받는다. 워낙 비좁은 데다 넘실대는 파도 위에서 탈출 훈련을 하려니 체력적으로 정말 만만치 않았다. 해군 함정으로 돌아와 체중을 재보니 두세 시간 만에 5㎏쯤 줄어 있었다.

실제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로 귀환할 때 사고가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돌아온 직후에는 얼마나 큰 사고였는지 나도 잘 몰랐다. 러시아 사고조사반이 조사를 마치고 결과 브리핑을 해줄 때에야 목숨이 오락가락했다는 걸 알았다. 조사반 관계자가 “그 열에 5초에서 10초만 더 노출되었어도 다 불에 타 죽었을 것”이라고 하더라.

귀환 우주선 안에서 이상한 낌새는 없었나?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분리된 뒤 소유즈 우주선이 지구에 재진입하면 고도 140㎞ 정도에서 3개 모듈로 분리된다. 우주인들이 타고 있는 착륙 모듈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기 마찰로 타서 없어지고 착륙 모듈만 지상으로 내려간다. 화면에 분리가 성공적으로 되었다는 신호가 떠서 ‘잘 가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오른쪽 창밖으로 뭔가 반짝이며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러시아에서 훈련받을 때 우리 팀 선장이었던 막심은 장난을 좋아하는 유쾌한 분이었다. 귀환 시뮬레이션 훈련 중에 모듈 분리가 끝났다는 신호가 뜨면 “거주 모듈 안녕” 하면서 창 쪽으로 손을 흔들기에 한번은 ‘분리가 무사히 끝나면 분리된 몸체들이 날아가는 게 창밖으로 보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막심이 ‘바깥으로 무언가 보이면 진짜 큰일 난 것’이라며 한 시간 넘게 모듈 분리 과정 하나하나를 설명해줬다.

그 기억이 나서 귀환선 선장에게 창밖에 뭔가 보인다고 했더니 믿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유즈 우주선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우주선으로 알려져 있고, 귀환선에 함께 탄 유리 말렌첸코 선장과 페기 윗슨 두 분 모두 경험이 많은 선배 우주인이었다. 내가 긴장해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중력가속도가 확 느껴졌고 어느 순간 우주선 내부에 빨간색 불이 켜지면서 삑삑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탄도궤도로 귀환하는 비상 상황이라는 알림이 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듈 분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러면서 대기와 마찰 때문에 안테나가 완전히 타버렸고, 착륙 모듈의 해치도 일부 탔다. 마지막에 낙하산이 제대로 펼쳐지면서 뒤집히지 않은 상태로 착륙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착륙 후 카자흐스탄 유목민들에게 발견됐다.

원래 소유즈 우주선은 착륙이 가까워지면 헬기 세 대가 따라붙는다. 우주선이 완전히 땅에 떨어지면 구조팀이 해치를 두드리고 그때까지 우주선에서 대기하는 것이 정석이다. 30분 이상 기다린 것 같은데도 기척이 없었다. 유리 선장이 아무래도 우리 자력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무중력 상태인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오면 사실 몸을 가누기가 어렵다. 무거운 몸을 끌고 겨우 우주선을 빠져나왔는데 기다리던 구조팀은 보이질 않고 카자흐스탄 유목민들이 다가왔다. 연기 나는 물체가 하늘에서 떨어지니 놀라서 달려온 것이다. 구조팀이 우리를 찾을 때까지 초원에 뻗어 있던 우리에게 그분들이 이불도 덮어주고 눈도 가려주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떨어진 곳이 원래 착륙 목표 지점에서 500㎞나 벗어나 있었다.

지구 귀환 당시 카자흐스탄 초원에 비상착륙한 이후 구조팀이 도착해 찍은 사진. 위즈덤하우스 제공

시간을 앞으로 돌려 2008년 4월8일 지구를 떠나던 날로 가보자. 책을 보면 카자흐스탄 발사장에서 발사 장면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혼절했는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긴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가 쓰러지셨다는 건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서야 알았다. 그때는 우주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사실 그날 막판에 발사를 하니 못하니 하는 상황이 있었다. 발사를 기다리며 우주선 안에 실려서 마지막으로 우주복 테스트를 하는데 선장의 우주복에 문제가 생겼다. 컨트롤에 보고하고, 그쪽에서는 또 어떻게 할지 회의하고. 그사이에 우리 셋은 비좁은 소유즈 우주선에 끼어 앉아서 “우리는 우주 갈 팔자가 아닌가 보다. 우리는 우주에 못 갈 사람들인데 운명을 거스르려다가 이렇게 되었나 보다” 그런 얘기를 했다(국제우주정거장으로 올라가는 소유즈 우주선에는 선장 세르게이 볼코프, 엔지니어 올레그 코노넨코, 우주 실험을 맡은 이소연 박사가 탑승했다). 왜냐하면 세르게이와 올레그 모두 더 일찍 우주에 갔어야 하는 사람들인데 여러 사정이 겹쳐 그 당시 우주선을 타지 못했다. 비행이 미뤄지면 뒤에 예정돼 있던 우주인들 다음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몇 년을 기다린다. 나도 예비 우주인이었다가 발사 두 달을 남겨놓고 탑승 우주인이 되지 않았나. 우주에 못 가는가 보다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최종적으로 발사 결정이 났다. 엔진이 딱 켜지니까 셋이 너무 신나서 막 소리 지르고. 무서워하고 긴장하고 이럴 겨를이 없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인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발사장을 깜짝 방문했다.

정말 놀랐다. 테레시코바는 전설적인 우주인 중 한 사람이다. 1962년에 보스토크 6호를 타고 70시간50분 동안 지구궤도를 돌았다. 발사대 앞에서 환하게 반겨주시더니 우리 할머니가 소풍 가는 날 학교 데려다주듯 발사대까지 함께 가주셨다. 계획에 있었다면 주변의 모든 러시아 교관이 테레시코바가 온다는 얘기를 수십 번은 했을 거다. 한국 최초 우주인이 젊은 여성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정을 변경해서 갑작스럽게 방문한 거라고 다들 추측했다.

여성 우주인들 사이에서 통하는 유대감이 있을 것 같다. “한국 우주인이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라는 소리를 실제 듣기도 했다.

단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여자가 소수인 환경에서 아무래도 더 뭉치게 된다. 지금까지 우주비행을 다녀온 사람이 600명 좀 넘는데 여자 우주인이 10%가량 된다. 새로 배출되는 우주인 중에도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다. 우주에 올라가면 몇 달 동안 아이와 떨어져 있어야 하지 않나. 우주탐험가협회에서 모이면 여성 우주인들끼리 그런 얘기가 잘 통한다.

2008년 4월10일 해치를 열고 국제우주정거장에 들어섰다. 우주에서 보는 지구는, 또 우주는 어땠나?

별이 쏟아질 듯이 떠 있는데 색깔이 다 다르다. 별의 온도가 높으면 파란색, 온도가 낮으면 빨간색이라고 과학 교과서에서 배우지만 지구에서는 거의 노란색으로만 보이지 않나. 우주에서는 북두칠성 7개 별의 색이 모두 다르게 보인다. 내가 발 딛고 있던 지구를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조금이라도 맛보면 더 먹고 싶어지듯이 우주복을 입고 나가서 360도로 보면 어떨까, EVA(Extra-vehicular activity:우주 유영을 포함한 선외 활동) 하는 사람들 눈에 비치는 모습이 궁금해지더라.

국제우주정거장에서 9일 동안 의뢰받은 과학 실험을 18개 했다.

우주인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과학 실험이다.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제안서를 제출했고, 정부가 구성한 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우주에서 수행할 18가지 실험을 선정했다.

러시아 쪽에서는 그 기간에 우주인 한 사람이 다 수행하기는 무리라는 의견을 한국 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던데.

러시아 담당자 말이 “너희 정부가 너무 욕심을 냈다”라고 하더라. 다른 우주인들도 18개 중에 절반만 수행해도 성공이라고들 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대학원 시절, 다른 기관에 있는 장비로 테스트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누군가에게 실험을 맡긴 채 결과를 기다리는 그 마음을 나도 안다. 당시 방송을 통해서 공개한 실험들은 물방울 튀기기 등 청소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교육용 실험이 대부분이었다. 실제 전문 과학 실험은 거의 방송을 타지 않았는데 앞으로 연구에 초석이 될 만한 중요한 실험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무중력 환경을 이용해 균일하게 입자를 합성하는 ‘결정 성장 실험’은 우주에 공장을 세워 부가가치가 높은 물질을 생산하는 산업과 연결되는 기초 연구이다. 후속 실험이 계속되었다면 과학기술 발전에도 이바지했을 텐데, 더 이상 우리나라의 우주 실험이 이어지지 않은 것이 많이 안타깝다.

이소연 박사는 국제우주정거장에 9일간 머물며 18가지 과학 실험을 수행했다. SBS 제공

우주에서 바느질도 했다고?

그렇다. 우주정거장에 도착하고 처음 한 일 중 하나가 비행복의 패치를 전부 면도칼로 뜯어내고 새 패치로 꿰매는 것이었다. 우주인이 가기 몇 달 전에 화물선으로 짐을 미리 부치는데 그때는 부처 이름이 ‘과학기술부’였다. 내가 우주에 갔을 때는 ‘교육과학기술부’였다(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부처 이름이 바뀌었다). 실험 장비에도 모두 과학기술부 스티커가 붙어 있어서, 지구랑 교신에서 번번이 “그거 다 어? 확실히 다 붙였어?”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우주인, 혹은 우주 실험과 관련된 후속 사업이 전혀 계획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다”라고 책에 썼다.

대한민국 우주인 배출 사업이 우선 3년 기한 프로젝트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인데 뒤에 정말 아무 일도 없겠어? 후속 계획이 세워지겠지’ 했는데 우주에서 돌아와 보니까 정말 아무것도 없더라. 그때는 정권도 바뀌고, 담당자도 다 바뀌고 딱히 누구한테 뭘 물어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비행 후 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에서 최소 2년간 근무하는 것이 우주인에게 부과된 임무였다. 어떤 자료를 보니까 내가 2008년 5월부터 2012년 5월까지 4년 동안 강연 235회, 행사 90회, 언론 접촉 203회 활동을 했더라. 우주인의 경험을 대중적으로 공유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만, 우리나라가 다시 우주에 나갔을 때를 준비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일주일 중에 하루나 반나절 정도는 연구 시간을 보장받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내 딴에는 우주에서 했던 실험들이 후속 실험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키트도 만들고, 예산을 확보할 방안도 알아보고, 지상 실험을 위해 공군 시설도 찾아가보고 했다. 그러나 우주인 프로젝트가 일회성 사업으로 마무리된 이상 한계가 있었다. 부처의 한 인사로부터는 “우주 갔다 와서 이 정도로 유명해졌으면 되었지 왜 자꾸 뭘 더 하려고 하냐”라는 얘기도 들었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바라본 지구. 위즈덤하우스 제공

2012년 미국 MBA로 유학을 떠났고 2014년에는 항우연을 퇴사했다.

임무 규정은 2년이지만 선임연구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 기간이 지난다 해도 항우연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우주인 타이틀로 평생 안정적인 직장 생활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다. 2012년이면 우주에 다녀온 지 4년이 다 돼가는 때였는데도 여전히 강연과 행사가 너무 많았다. 약간의 공백기도 필요했고, 우주인의 경험만 나누는 사람에서 한 발짝 도약하기 위해서는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결정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먹튀’ 논란뿐만 아니라 ‘국적 포기’처럼 거짓으로 밝혀진 가짜뉴스도 계속해서 이소연이라는 이름을 따라다닌다.

항우연 퇴사가 한국에서 큰 뉴스거리가 되자 한국 최초의 우주인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비춰졌다. ‘뭐 시간이 지나면 오해가 풀리겠지’ 했는데 왜곡된 기사들이 퍼져나갔다. 지금 돌아보면 비난의 화살을 돌린 언론들은 많이 원망스럽다. 관련 부처를 출입하는 과학 분야 기자들이 대부분 그런 기사를 썼는데, 국책 과제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내가 어떤 고민의 끝에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주인 하나가 유학을 갔다고 있던 과제가 사라지고, 있는 프로젝트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 만한 분들이 이상한 방향의 기사를 썼다. 그러나 우주인 프로젝트의 이면을 몰랐던 국민들로서는 그런 기사를 접하면 ‘우주까지 보내놨더니 무책임하게 미국에 갔어?’라고 화를 내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에서 기다릴게〉를 어떤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라나?

우주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거나 우주인이 되고 싶은 분들이 읽어줬으면 한다. 자기 꿈에 판타지만 가지고 뛰어들었다가 생각한 것과 현실이 너무 달라서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사실 책에 실린 정도면 꽤 순한 맛인데, 이걸 보고 ‘상상과 많이 다르네’ 한다면 본인의 꿈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으시면 좋겠다. 만약 누가 ‘이걸 다 알지만 또 최초 우주인이 될래?’ 하고 묻는다면 나는 우주에 갈 거라고 답할 것 같다.

김연희 기자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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