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하준 “오래 일한다고 선진국 안돼”…노동시간 굴레 갇힌 韓
“구시대 발상 벗어나 기술과 생산성으로 극복해야”
“400년 자본주의 초유의 10년 제로금리가 옥석 못가리고 지금 위기 키워”
10년 만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차분했지만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음식이란 가벼운 소재로 쉬운 경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지만 어느 경제학 강의 못지않게 묵직하고 진중했다.
주류 경제학인 신고전학파에 벗어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비주류 경제석학이자 스스로를 ‘배고픈 경제학자(hungry economist)’라 부르는 장하준 영국 런던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해 6월 32년간 몸 담았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런던대학으로 옮긴 그가 최근 18가지 음식을 통해 얽히고설킨 세계 경제의 구조와 흐름을 읽어주는 신간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로 10년만에 대중들과 소통을 시작했다.
마늘, 코코넛, 국수, 닭고기, 딸기 등 친숙한 음식들을 식탁에 올려 맛깔나는 경제를 ‘요리’했지만, 그의 행간에는 나라 간, 개인∙기업 간 불평등과 불공정, 국가 이기주의, 편향된 노동의 가치와 같이 잊지 말아야 할 씁쓸하고 불편한 진실도 가득하다. 장 교수는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대중들과 소통하고 싶었을까?
3월 말 한국을 찾아 바쁜 일정을 소화 중인 장 교수를 벚꽃이 만발했던 4월 첫 주말 제주에서 만났다.
경제는 대중의 것…민주주의 지키려는 ‘미끼’
-‘경제학 레시피’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경제 문맹’ 퇴치가 목표다. 책에서 음식을 재료로 쓴 것은 더 많은 이들이 경제를 쉽게 이해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하고 싶은 일종의 ‘미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 대중이 경제를 모르면 민주주의도 의미가 없다. 특히 요즘같이 시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선 더 그렇다. 경제(또는 경제학)가 대중의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영역이라고 하는 이들도 많은데, 잘못된 시각이다. 어려운 전문 용어와 복잡한 통계를 앞세워 정치∙사회로부터 경제를 분리하는 것은 정치 혐오를 불러오고 결국 민주주의 후퇴를 가져온다.”
사실 경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모든 이의 삶에 경제가 녹아 있다. 임금이나 은퇴 후 노후 자금을 고민하고, 재직 중인 회사가 글로벌 기업과 어떻게 경쟁하느냐, 대중교통 요금과 물가 인상으로 가처분 소득을 줄여야 하는 것에도 모두 경제가 깔려 있다. 20세기 들어 이른바 주류 경제학이라고 불리는 신고전주의 학파가 ‘경제학’이란 이름을 내세워 어려운 숫자와 학문으로 장벽을 세워 어렵게 느껴지는 거다.”
꺼지지 않은 불씨가 키운 화재
-또다시 불거진 경제위기의 원인은 뭔가?
“최근 경제 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연장선에 있다. 미국·영국 등이 구조 개혁보다는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라는 대증적 요법을 통해 당시 금융위기에 대응했고, 그 결과 현재 금융위기 징후가 다시 재현된 거다. 1929년 대공황 때는 1∙2차 뉴딜정책을 쓰면서 은행의 무분별한 투자를 막는 금융감독법을 제정하는 등 경제구조 개혁도 병행했지만 2008년 위기 때엔 구조개혁 없이 자금 투입만 했다.
400년에 가까운 자본주의 금융 역사상 제로 금리를 10년 이상 유지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양적완화를 통해 엄청난 돈을 풀었다. 자산 거품이 낄 수밖에 없고, 기업의 옥석을 가릴 기회를 놓친 결과가 됐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을 사실상 10여년간 폐쇄한 것과 같은 셈이 됐다.
주기별 경기 등락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번 위기는 그렇지 않다. 잘못된 투자에 따른 부실이 청산돼야 비로소 하나의 주기가 끝나는데, 지난 위기 때 청산돼야 했을 것들을 인위적으로 막았다. 너무 큰 폭탄이다 보니 터지게 못 하게 막았던 거다. 남았던 잔재 부실이 이제 더 큰 폭탄이 됐다.
나라마다 고민이 클 거다. 고삐 풀린 물가를 잡겠다고 금리를 올리자니 그동안 쌓였던 부실이 계속 터질까 두렵고, (금리를) 그냥 두자니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 같고. 진퇴양난인 셈이나,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금리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올리는 속도를 늦추면서, 반은 공개, 반은 비공개적으로 부실자산을 처리하는 방안을 찾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예상한다.”
선택적 자유의 함정
-최근 주 69시간 근로제가 이슈가 됐는데….
“예컨대 어떤 행인이 길에서 총 든 강도를 만났다고 치자. 강도가 ‘지갑을 내놓거나, 총에 맞거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라고 했다면 이것을 강도를 만난 행인이 가진 자유로 볼 수 있겠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구조적 상황에 따라 자유가 자유가 아닌 경우가 생긴다. 정부는 ‘일할 자유’라고 했지만, 결국 장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비정규직이거나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 취약계층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 69시간 근로는 진정한 일할 자유가 아니다.
정부는 주 69시간 노동이 선진국형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오래 일하는 선진국은 없다. 굉장히 구시대적 발상이다. 1970년대면 노동시간을 늘리자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21세기에, 세계 20위 안에 드는 나라에서 어떻게 노동시간을 늘려 경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나. 역사적으로도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는 나라에서 노동시간으로 경쟁력을 늘리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세금의 가성비
-감세 효과는 있을까?
“감세로 투자가 확대된다는 주장은 증거가 없는 얘기다. 1950년대 영국이나 미국 등 선진국들이 당시 90%대에 이르는 최고 세율을 대폭 낮췄지만, 미국의 투자는 늘지 않았고 심지어 영국은 떨어졌다. 세금도 경제학적으로 손익 분석의 시작으로 봐야지 세율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세율 자체가 중요했다면 전 세계 모든 기업이 법인세가 가장 낮은 파라과이 같은 나라로 이전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세금을 더 내더라도 기업활동 하기 좋은 나라를 찾는다. 중요한 건 정부가 걷어가는 세금만큼 서비스를 제공하느냐다. 세율 자체가 아니라 세금의 가성비를 얘기해야 할 때다.
정신 발달 정체된 성장 발육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을 평가한다면?
“점수로 평가하기보다, 대학생으로 비유하자면 수강 신청을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철 지난, 그것도 한참 지난 두 세대 전 수강 과목을 듣고 있는 거다. 지금은 인공지능(AI)과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시대고, 세계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나야 하는 위중한 시기다. 생산성과 창의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데 지금 주 69시간 노동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몸(경제적 위상)은 자랐는데, 정신은 자라지 못하고 70년대 80년대에 머물러 있다.
우리 경제 수준에 맞는 경쟁력 제고 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 정부는 노동시간 문제같이 철 지난 쟁점으로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 기업의 경쟁력과 국가 경제의 문제는 노동시간에 달린 게 아니다. 중소기업이 잘 돼야 한다면서 중소∙중견 기업이 발달한 독일의 사례는 연구하지 않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는 어떻게 해소하고, 한국의 국제 경쟁력을 어떻게 키울지, 이런 의미 있는 것들을 궁리해야 한다. 혁신하고, 기술에 투자하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때다. 정책적 사고에 질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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