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을 권리', 왜 정치인에 맡기나...프랑스는 '시민의회'가 결정했다

신은별 2023. 4. 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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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제 보완 프랑스 '시민의회' 살펴보니
존엄사 등 적극적인 임종 지원을 주제로 열린 프랑스 시민의회에 참가한 시민들. 프랑스 경제사회환경위원회 홈페이지, copyright KATRIN BAUMANN

'스스로 죽을 권리의 실현'을 위해 존엄사와 조력 자살 등을 제도로 보장해야 한다는 데 프랑스인 75.6%가 찬성했다. 여론조사 결과가 아니다. 논쟁적 사회 현안에 대한 입장을 정해 '국민의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에 전달하는 공식 기구인 '시민의회'의 결론이다.

시민의회는 프랑스 상·하원에 이은 '제3의 의회'라고 불린다. 대의 민주주의가 누락하는 국민의 '진짜 목소리'를 법과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 시민의회의 취지로, 프랑스에선 2019년 도입됐다. 영국, 독일, 아일랜드 등도 시행 중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3일(현지시간) 시민의회의 최종 보고서를 확인한 뒤 "올해 여름이 끝나기 전에 관련 법을 개정해 '프랑스식 임종 선택 모델'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번 시민회의를 소집한 건 지난해 9월 마크롱 대통령이다. 국민의 삶을 좌우할 중대 현안을 정부, 의회의 소수가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시민의회에 맡긴 것이었다.

프랑스 시민의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토론하는 모습. 프랑스 경제사회환경위원회 홈페이지, copyright Katrin Baumann

대의제 한계 뚜렷... 시민의회, 의견 개진 '공식 창구'

간접 민주주의 제도, 즉 대의제의 취약점은 투표 참여 이외엔 정부, 국회에 주권자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시민의회다. 정치인 입장에서도 윈윈이다. 권력을 시민들과 나누는 대신 의사 결정의 부담도 나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의회는 유럽을 중심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12월 기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37곳이 시민의회를 운영 중이다(프랑스 컨설팅업체 콘설트복스).

한국에도 비슷한 협의체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헌법 개정을 추진하며 '숙의형 시민토론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법적 권한이 없는 기구여서 지속성이 없었다.


"정부 독선 막자" 목소리에... 프랑스, 4년 전 합류

프랑스 시민의회는 2018년 유류세 인상에 반대해 일어난 전국적 시위인 '노란 조끼 운동'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정부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게 해달라"는 시민사회 의견을 정치권이 수용했다. 정부 기구인 '경제사회환경위원회(CESE)'가 담당하는 시민의회를 만들었고, 현재까지 '기후 위기 대응 방안'(1차·2019~2020년), '적극적 임종 지원 방안'(2차·2022~2023) 등 두 번의 시민의회가 소집됐다.

프랑스 정부는 '국민의 의견을 듣고 결정해야 한다'고 판단되는 사안에 대해 언제든 시민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 시민의회에 참여할 시민의 대표는 투표가 아닌 추첨으로 뽑는다. 무작위로 선정하되, 성별, 나이, 지역, 학력, 직업 등 국민 대표성을 반영한다.

시민의회 참가자들은 수개월 동안 전문가 강의, 내부 토론 등을 통해 안건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쌓는다. 참가자들이 개개인의 결론을 내면, 이를 종합해 보고서 형태로 결론을 도출한다. 보고서 형식과 내용 모두 시민의회가 결정한다.

프랑스 시민 의회에 참석한 한 시민이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프랑스 경제사회환경위원회 홈페이지, copyright Katrin Baumann

4개월 존엄사 논의에... "60명 전문가, 27회 회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임종 지원 관련 제도 변경이 필요한가"를 물으며 시민의회를 소집했다. 개인 전화번호를 기반으로 시민의회 참가자 185명을 선정했는데, 공정성 확보를 위해 참가자 추첨을 민간 기관(해리스인터랙티브)이 맡았다. 참가자들은 하루 94.56유로(약 13만5,676원)의 수당을 받았다. 소득 손실분도 보전받았고, 교통비, 숙박비, 식대, 보육비도 제공받았다. 이러한 보상은 경제적 이유로 특정 계층이 참가를 꺼려 시민의 목소리가 불평등하게 반영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12월 9일 첫 회의가 열렸다. 토론 주제, 운영 규칙부터 결정했다. 토론은 여러 개의 하위 그룹별로 진행됐다. 전체 회의를 지양한 건 소수가 전체 여론을 주도하는 것을 막고 모두가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발언권 보장을 위해 회의 내용은 비공개에 부쳤다.

이후 27번의 토론과 9번의 검토 회의가 열렸다. 참가자인 제롬은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늘 올바르게 토론이 진행됐고, 상대를 깊이 존경했다"고 프랑스 언론 프랑스인포에 말했다.

프랑스 시민의회 참가자의 자료가 회의장에 놓여 있다. 프랑스 경제사회환경위원회 홈페이지, copyright Katrin Baumann

시민의회엔 각계각층 전문가들이 총동원돼 풍부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의료, 법률, 행정, 종교, 철학 분야 전문가는 물론이고 불치병을 앓는 환자, 간병인 등도 출석해 참석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CESE 관계자 등이 전문가 섭외, 회의 운영 등 행정 업무를 맡았지만, 참가자들의 의사 결정 과정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최종 보고서가 나왔다. "프랑스의 임종 지원 제도를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게 골자다. 참가자의 92%가 보고서 채택에 찬성했다. "존엄사, 조력 자살 등 적극적인 임종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진술에 찬성한 비율은 75.6%였다.

보고서에는 찬반 이유, 우려, 제안 등이 두루 담겼다. "미성년자에게는 적극적 임종 지원을 고려해선 안 된다", "적극적 임종 지원 대상으로 선정할 불치의 기준, 고통의 정도 등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와 같은 내용들이다. '숫자'로만 표현하면 누락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긴 것이다.

시민의회에 참석자 나탈리는 "민주주의를 소수 전문가에게만 맡겨선 안 된다"며 "정보와 시간이 주어진다면, 모든 시민이 민주 절차에 참여해 발언할 수 있음을 시민의회가 보여줬다"고 프랑스인포에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일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2차 시민의회 보고 대회에 참석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파리=AP 연합뉴스

'수용 의무' 없지만 '존중 의무'... 마크롱의 선택은?

시민의회 활동은 요식 행위로 끝나지 않았다. 마크롱 대통령은 시민의회에 신뢰를 보냈다. 그는 "'도구(시민의회)'가 성숙한 것 같다"며 "곧 새로운 시민의회를 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퀘스트프랑스는 보도했다. 그는 죽을 권리에 대한 더 많은 지원·연구가 필요하다는 시민의회 의견을 수용해 "10개년 국가 계획을 수립하겠다"고도 했다.

다만 시민의회에 정책 결정권이 없다는 것은 한계다. 1차 시민의회에서 나온 기후 대책 권고는 온전히 수용되지 않았다. 철도로 4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오가는 국내 항공편 노선을 폐지하고 항공세를 올리라는 내용이었는데, 항공세 인상은 무산됐고 '철도로 2.5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로 조건이 완화됐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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