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두더지 땅굴’을 아시나요

기자 2023. 4. 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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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는 땅속에서 홀로 생활하지만 가끔씩 바깥으로 나온다. 생존을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땅 밖에서 생활하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까이에 ‘두더지 땅굴’이 있다. 은둔과 고립에 지친 청년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환대하며 땅 위로 나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온라인 플랫폼 ‘두더지 땅굴’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전국에서 800여명의 청년과 가족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남경아 사단법인 씨즈 중장년사업본부 본부장

어디까지를 고립과 은둔으로 볼 거냐에 대해서부터 정리가 필요한데 서울시는 6개월을 기준으로 정서적·물리적 고립상태가 지속되거나, 외출이 거의 없이 집에서만 생활하며 직업·구직 활동이 없는 경우로 규정했다. 이런 청년들이 서울시에만 12만9000명, 전국적으로는 약 61만명으로 추정된다. 중·장년, 노년층의 고독 문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청년들의 고립·은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현장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고립·은둔의 경로와 상태는 매우 다양해서 매뉴얼로 단순 분류하기 힘들지만, 가장 큰 원인은 단연 실직과 취업의 어려움이다. 반복된 취업 실패가 대인기피로 이어지고 취업 공백은 또 다른 편견을 낳아 더 불리한 상태로 남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누구나 언제든 고립상태로 빠질 수 있다. 우울, 불안, 불면 등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기력하거나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지난해에 고립·은둔 청년들에게 일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SBS ‘곰손 카페 프로젝트’에서 매니저 4명을 모집했을 때 전국에서 700명이 넘게 신청을 했다고 한다. 낯선 공간, 타인과 직접 대면하는 게 힘들었을 뿐, 일할 의지가 없는 게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종일 자기만의 동굴 속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온라인을 통해 세상을 보고 정보를 얻고 자기 관심 분야에는 깊게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특정 분야에 재능을 보이고 기술을 쌓거나 덕후 성향을 보이는 이들도 많다.

다만 우리보다 앞서 이 문제에 주목한 일본과 비교했을 때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1인 청년 가구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지역 불균형이 가속화되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이주해 온 청년들이 서너 평 원룸에서 구직의 어려움과 싸우다가 점차 고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고독한 생을 사는 청년 문제를 가족 내부 문제로 국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영국의 고독청 신설(2018), 일본의 ‘외로움·고립감 종합 대책(2021)’ 발표 등 최근 경향은 정부 차원에서 별도 부서와 정책을 마련할 만큼 고독·외로움의 문제를 전 세대를 아우르는 국가적 과제로 보고 있다.

“햇볕 쬐며 외출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으면 해요” “삶의 변화가 필요해요” “가족 외 다른 인간관계가 필요해요” “작은 성과를 내는 경험을 갖고 싶어요” “나에게도 미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두더지 땅굴’에서 외치는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방 청소, 요리, 산책 같은 평범한 일상 활동도 이들에게는 큰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챌린지’가 된다. 따뜻한 공간과 손길을 내밀어 이들의 도전을 응원하는 것. 이제 어른 세대가 화답할 때다.

남경아 사단법인 씨즈 중장년사업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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