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마키아벨리를 넘어
넘쳐나는 작은 독재자들, 개혁 위한 사회적 연대를
전진성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요즘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권력의 속성에 대해 실감하고 있다. 권력을 잡았을 때 성인군자 행세를 하며 제대로 행사하지 않으면 결국 권력은 제 능력을 알아주는 주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권력은 효과적으로 쓰이라고 있는 것이지 유품처럼 고이 보관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려진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사상가 마키아벨리가 새삼 솔깃하게 다가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500여 년 전에 쓰였건만 오늘날에 보기에도 대담한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들이란 대개 배은망덕하고, 변덕스럽고, 가식적인 위선자들이며, 위험은 빠져나가려 하고, 이익에는 열정적이다.” “군주는 그의 신민들을 통합되고 충성스럽게 유지하기 위해 잔인하다는 불명예를 개의치 말아야 한다.” “인간은 두려운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 덜 주저한다.” 위험한 발언은 계속된다. 한 나라의 군주는 사자의 무서움과 여우의 꾀를 모두 갖추어야 하며, 좋은 자질을 다 갖추지 않더라도 적어도 갖춘 척 연출은 할 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이기심과 욕망에 가득 찬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세상에서 형식적 도덕률에 얽매여 국가 중대사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당대의 특출한 권력정치가인 체자레 보르자를 모델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교황의 서자이면서 추기경 자리까지 마다하고 용병대장이 되어 총칼로 나라를 세우고 권력 확대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개의치 않았던 인물이다. 본래 외교관 출신인 마키아벨리는 법의 지배를 국정의 근간이라 여겼지만 현실의 권력투쟁에서는 법만으로는 이기기 힘들다는 점을 십분 이해했다. “운명의 신(포르투나)은 여성이기 때문에 만약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싶다면 거칠게 다뤄줄 필요가 있다.” 운명을 거머쥐는 역량, 즉 비르투(virtu)야말로 국가 지도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미덕이다.
지독한 냉혈한처럼 말하는 마키아벨리는 실은 고전 저작들로부터 정치적 사고를 배운 인문주의자였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고 훨씬 분량이 많은 ‘로마사 논고’는 기원전에 쓰인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참조하여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로마공화정의 제도와 법률을 상세히 비교 검토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케로의 범례를 따라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라는 세 정체를 조합한 혼합정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학자적인 주장과는 대조적인 ‘군주론’의 과격한 주장들은 평상시가 아니라 어려운 시절에 요구되는 매우 특수한 행위윤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더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용기와 지혜에 대한 갈구였던 것이다. 더 이상 법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실정법의 형식논리에 구애됨이 없이 심지어 우격다짐으로라도 어떻게든 무너진 도덕과 사회정의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기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방책을 우리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기에는 쉽지 않다. 지도자의 실력에만 의존하기에는 사회전반적인 타락, 혹은 무기력증이 너무나 농후하기 때문이다. 실은 마키아벨리도 대중의 타락을 문제 삼은 바 있다. 그는 국가적 공공사안을 도외시하는 당대의 이기적 풍조에 절망감을 토로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 시대에는 더욱 피부로 실감된다. 주변을 돌아보면 작은 독재자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사람들은 늘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 혈안이 되어 하찮은 권한이라도 제 손아귀에만 들어오면 손오공 여의봉처럼 마구 휘두르기 십상이다. 공공기관들은 물론이고, 기업과 언론, 교육기관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각종 권력들이 공동체의 안위에는 아랑곳없이 제 몫 챙기는 실력 행사에만 경주하고 있으니 개혁이란 한낱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러한 요지경 속에서 개혁에 대한 기대가 특정 정당에 과중하게 쏠리고 있다. 자칫하면 정당 수뇌부의 판단 착오나 무능력, 혹은 일부 분파의 악의에 의해 순식간에 개혁의 의지가 소멸될 위험이 있다. 이와는 달리 사회적 에너지가 한쪽에 집중되지 않고 정계 노동계 교육계 문화계 등 각 부문에 편재하면서 마치 유럽 고딕성당의 버트리스, 즉 부벽처럼 서로를 지지해준다면, 설사 한 부문이 일시적으로 약화되더라도 개혁을 위한 연대가 쉽사리 와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로 아쉬운 점은 이러한 연대가 현재로서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선거판에서도 여러 번 드러났듯이 오로지 이익을 위해서만 똘똘 뭉치는 국민 다수에게 무얼 더 바라겠는가.
포르투나 여신이 우리에게서 멀어져 갈수록 우리 공동체의 운명을 단번에 역전시킬 특출한 정치 지도자의 비르투가 더욱더 절실해진다. 달리 어쩌랴. 미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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