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채 올 벌써 7조원… 한전發 ‘기업 돈맥경화’ 또 터지나
한국전력이 올 들어 석 달 만에 7조원에 가까운 회사채를 발행했다. 한전채가 시중 자금 시장에서 돈을 빨아들이는 ‘한전채 블랙홀’ 현상이 올해도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전은 전기 요금이 원가의 70%에 못 미쳐 전기를 팔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인데 지난달 말 전기 요금 인상까지 미뤄지면서 올해도 수십조원 손실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런 탓에 한전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빚(한전채)에 의존해 겨우 버티는 지경이다. 투자자들이 정부가 보증하는 우량 채권인 한전채에 몰리면, 일반 기업들이 채권을 발행해도 투자자 모집을 못 해 기업들의 ‘돈맥 경화’가 심해질 수 있다. 이미 우량 기업들조차 한전채 쏠림 현상을 피해 어음을 발행하고, 해외 투자자를 찾아 나서는 등 자금 확보를 위해 다방면으로 뛰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벌어진 ‘레고랜드와 한전채’발(發) 자금 경색이 재현되지 않으려면, 한전의 적자를 줄이기 위한 전기 요금 정상화와 한전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전채 피해서 어음 발행하는 기업들
한전에 따르면, 올해 한전이 발행한 신규 회사채는 이달 4일 기준, 6조8000억원(단기채 상환 반영)이다. 지난해 사상 최대였던 발행 규모(37조2000억원)의 18%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한전채는 자본 시장에서 늘 인기다. 지난 4일 입찰이 진행된 5300억원 규모 신규 발행에도 목표 금액의 2배가 넘는 1조2000억원이 몰렸다. 반대로 일반 기업들이 채권을 발행하면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5대 그룹의 한 재무팀 관계자는 “AAA등급과 AA등급 기업들은 상황이 그나마 낫지만, A등급 이하 기업은 회사채 모집이 힘든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한전채 물량이 시장에 더 쏟아지면 우량기업조차 자금 경색에 따른 어려움이 닥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올해 회사채 수요 예측에서 포스코(약 4조원), KT(약 2조8000억원) 등은 흥행했지만 신세계건설, 효성화학 등은 대거 미달이 발생했다. 이에 기업들은 CP(기업어음)로 눈을 돌리고 있다. 4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국내 일반기업(금융회사·협회·재단 등 제외)이 올 1분기 발행한 CP는 21조4000억원 규모다. 증권사 등 금융사가 발행한 CP까지 포함하면 국내 CP 잔액은 145조원으로, 1년 전보다 23조원 증가했다.
대기업들도 CP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올 들어 롯데그룹은 3조500억원, SK그룹은 3조490억원어치 CP를 발행했다. CP는 급전이 필요하거나 회사채 발행이 어려운 기업이 주로 활용하지만, 만기가 빨리 돌아오기 때문에 유동성이 악화할 우려가 있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회사채 모집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기업 이미지에도 손해”라며 “아예 회사채 발행을 포기하고 절차가 상대적으로 간단한 CP 발행을 택하는 곳도 많다”고 했다.
◇한전 올 1분기 5조 적자 예상… 갈수록 문제
정부가 전기 요금 인상을 보류한 가운데, 한전은 올 1분기 5조원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지난해 총 32조6000억원의 적자가 났다. 빚에 의존하지 않고선 버티기 어려운 구조다. 이 때문에 작년 말 국회는 한전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적립금의 2배에서 최대 6배로 늘리도록 법을 바꿨다. 현재 한전 자본금은 3조원, 적립금은 17조원으로 발행 한도는 104조6000억원에 달한다. 현재까지 누적 발행액은 76조2000억원으로 남은 한도는 약 28조원이다.
내년에는 자금 시장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한전과 대주주인 산업은행까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대규모 적자로 적립금을 까먹게 되면 한전채 발행 한도가 크게 줄어들고, 한전은 파산이나 세금 투입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업은행 재무 건전성에도 큰 타격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올해는 작년보다 금융시장 여건이 나아졌고 올해 초 정부가 한전채 발행 규모를 줄이겠다고 밝힌 만큼,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면서도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한전채가 발행될 경우엔 쏠림 현상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4일 한 언론사 행사에서 “추경호 경제부총리,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주현 금융위원장과 모임을 갖고 올해 한전채 신규 발행 규모를 관리 가능한 수준인 10조원 미만으로 하자고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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