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농민을 거부한 대통령을 거부한다
끝내 윤석열 대통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7년 만에 행사된 대통령 거부권의 대상이 절박한 농민들의 민생법안이란 사실에 분노가 치솟는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국회 입법권에 대한 무시를 넘어 농민들의 생존권과 식량주권에 대한 포기선언이나 다름없다.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민주당이 7건의 개정안을 발의하고, 6개월 넘게 법안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단 한 건의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입법 논의를 사실상 보이콧한 것이다. 또 최근엔 마치 충성경쟁이라도 하듯 장관과 총리, 여당 대표에 이르기까지 법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과장된 우려만 일삼으며 ‘거부권 합창’을 반복해 왔다.
마치 지침이라도 내려온 듯 이들의 논리는 앵무새처럼 한결같다. 이미 일부 언론과 전문가 등이 문제를 제기한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보고서는 개정안이 소위를 통과한 지 16일 만에 급조된 것이며, 한 번도 검증되지 않은 허점투성이 보고서에 불과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만성적인 쌀의 과잉생산을 적극적인 재배면적 관리와 생산 조정을 통해 해소하자는 ‘양곡관리법’의 핵심 취지엔 눈을 감은 채, 소방시설처럼 돌발상황을 대비한 안전장치와 같은 의미의 시장격리 제도를 두고 ‘무조건 매입’ ‘무제한 수매’라며 끊임없이 거짓선동을 해 왔다.
양곡관리법은 국무총리의 주장처럼 ‘남는 쌀 강제매수법’이 아니라 ‘과잉생산 방지법’이며 ‘남는 쌀 방지법’이다. 이미 여러 차례 정부 정책으로 성공한 사례도 있다. 이명박 정부는 3년간(2011~2013년)의 생산조정을 위해 연평균 506억원을 투입해 생산과잉을 해결하고 17만원대의 쌀값을 유지한 반면, 박근혜 정부는 3년간(2014~2016년) 늦장 시장격리에 연평균 5000억원 넘게 투입하고도 쌀값 대폭락을 피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생산단계부터 다른 작물 재배를 권장해 쌀 과잉생산을 사전에 해결함으로써 폭락한 쌀값을 정상화시킨 바 있다. 이러한 ‘저비용 고효율’ 정책은 오히려 시장격리 최소화법으로 정부가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할 대안이다.
이런 개정안의 취지와 쌀의 중요성을 국민은 이해하고 공감했지만, 정부는 매몰차게 외면했다.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전에도 불구하고, 양곡관리법에 대한 찬성 여론이 66.5%에 이르고, 거부권 행사를 반대하는 여론도 55.2%로 찬성보다 20%포인트 가까이 높았다.
대통령을 향한 민심과 농심의 명령이 이런데도, 정부가 거부권 행사의 명분으로 삼고 있는 농업계 의견수렴의 실체는 더욱 경악스럽다. 제출한 자료를 보니,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간담회 참석자가 고작 58명이라고 한다. 개별 접촉은 있어도, 공개적인 의견수렴은 없었다는 자백이다. 참석자도, 반대 단체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그 흔한 여론조사도 실시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의 비정함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농촌소멸과 지방소멸이라는 위기 앞에 하나가 되어도 모자랄 농민들을 지도부와 현장으로 갈라치고, 쌀농사 짓는 농민들과 다른 작목을 재배하는 농민들 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정부가 할퀴고 간 깊은 상흔의 뒤처리조차도 농민들의 몫으로 떠넘겨 버렸다.
민주당은 거부권 행사로 모든 것이 물거품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원안보다 후퇴했다는 비판까지 감수하며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국민의힘이 운운하는 ‘입법 폭거’의 진실이다. 대화와 타협을 실종시킨 주체는 바로 정부와 여당이다.
윤석열 정부의 거부권 행사는 입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을 넘어 국민의 삶과 쌀값 정상화에 대한 포기선언이다.
신정훈 더불어민주당 쌀값정상화TF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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